기삼연(奇參衍, 1851년 1월 18일~1908년 2월 3일) 은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소곡리 탁곡에서 아버지 기봉진(奇鳳鎭)과 어머니 장흥고씨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리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수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기삼연은 군사 부문을 담당하여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렸다. 그러나 정부에서 파견한 선유사 신기선 등의 설득으로 의병이 해산되면서 거병은 무산되었다. 이후 재거를 모의하던 중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옥에 구금되었다가 한성부 평리원으로 이감되었으나, 원장 이용태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은신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 운동이 다시 일어나자, 1907년 9월 전남 장성군 수록산 석수승암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조직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일본인과 일제에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같은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암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며, 영광·부안·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12월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하여 불태우고 창곡을 탈취하여 군자로 사용하고 남은 것은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겨울 추위로 의병이 분산되고, 12월 27일 담양 추월산성에서 설을 쇠기 위해 머물렀다가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탈출하였다. 순창 복흥 산중에서 은신 중 부상을 치료하다가 1908년 1월(음력)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2월 3일(음력 1월 2일) 광주 서천교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으로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呑日曾年夢亦虛)"라는 한시가 전해진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47년 전북 진안의 이산사(駬山祠)에 배향되었고, 1966년 장성군 장성읍에 순국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