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량부(及梁部)는 신라 초기의 정치체 및 행정 구획 체제인 육부(六部) 체제를 구성한 여섯 개 부 가운데 하나로, 양부(梁部)라고도 불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급량부는 신라 6부 체제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정치체로 기록되어 있다.
명칭과 문헌상의 표기
고려 시대에 편찬된 문헌 사료 가운데 『삼국사기』에서는 '양부(梁部)'라고 두 글자로만 표기되어 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앞에 '급(及)' 자를 붙여 '급량부(及梁部)'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편 신라 당대에 작성된 금석문(金石文) 자료에서는 '喙部'라는 다른 명칭으로 표기되었으며, 이 '喙'의 발음을 둘러싸고 '탁부', '닭부', '훼부' 등 여러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
급량부의 명칭에 관해서는 '급(及)'을 바탕, 근저(根底)를 의미하는 우리말 '밑'의 차자(借字)로 이해하고, 양부를 비롯해 '~량부'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부들의 뿌리가 되는 부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 당대 금석문 자료에서 '喙部' 앞에 '급(及)'이 붙은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급량부'라는 표기는 전록(轉錄)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한 결과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즉 '무슨무슨 부와 양부'라는 뜻의 'OO부급량부(部及梁部)'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및(及)'이 부명의 첫 글자로 잘못 읽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원과 역사적 변천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32)조에 따르면, 급량부는 혁거세 등장 이전부터 경주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6촌 가운데 하나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 개편되어 생겨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알천양산촌은 양산부(楊山部)에서 양부(梁部)로 개명되었고, 성(姓)으로는 이씨(李氏)가 내려졌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시기에 '양부'라는 이름이 생기고 이씨가 부여되었다는 기록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는 6세기에 작성된 신라 금석문에서 '喙部'가 왕실인 김씨(金氏)의 소속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양부와 사량부(沙梁部)가 주축이 되어 6부 체제가 갖추어진 시기에 관해서는 이사금 시기라는 설과 마립간 시기인 5세기 전반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있다.
양부는 6부 가운데 가장 유력한 부로, 6세기 전반까지 6부 체제를 주도한 정치체였다. 524년(법흥왕 11)에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는 왕인 법흥왕이 '喙部'에 소속된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는 김씨 왕실의 주요 구성원들이 양부 소속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시기까지 신라 왕이 6부 체제를 초월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6부 체제는 불교 공인 과정에서 왕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극복되었으며, 7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기에 들어서는 정치체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단순한 왕경(王京)의 행정구역으로 성격이 변경되었다.
지리적 위치와 소속 지역
급량부의 위치는 대체로 현재의 경주시 시가지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급량부에 속했으며, 『동경잡기』에 의하면 월남(月南), 남건(南建)도 이에 속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 북천 일대가 급량부의 영역으로 추정된다. 알천양산촌이 급량부 이씨의 조상과 관련된 곳으로, 경주 이씨의 시조인 알평(謁平)이 탄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급량부는 고려 태조 시기인 940년에 중흥부(中興部)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명칭의 어원에 관한 학설
'급량'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한 학설에 따르면 '及'의 후기 상고음은 '/*kalp/'이며, 서쪽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로 추정되는 '갋'을 음차 표기한 것이고, '梁'은 '/*tulk/'로 재구되며 도랑을 뜻하는 중세어 '돓'에서 고대 한국어 '돍'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급량부'는 '서쪽 하천 마을'을 뜻하며, 형산강(서천) 자락에 위치한 알천양산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학술적 추정에 기반한 해석으로, 명칭의 정확한 어원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도 이견이 존재한다.
종합하면, 급량부는 신라 육부 체제의 핵심을 이룬 주요 정치체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신라 초기 정치 구조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 실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