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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리 쿨리크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1890년 11월 9일 ~ 1950년 8월 24일)는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으로, 소련 원수(Marshal of the Soviet Union) 계급을 역임한 인물이다. 우크라이나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 육군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한 뒤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와 붉은 군대에 합류하였다.

러시아 내전 당시 차리친 전투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싸우면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스탈린이 가장 신뢰하는 장성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였다. 1937년 붉은 군대 주포병총국(주포병청)장에 임명되어 신형 전차와 포병 무기의 개발·생산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쿨리크는 군사 기술과 이론 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T-34 전차, KV-1 전차, 카츄샤 로켓포 등 당시 혁신적인 무기 체계를 도입하는 데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 국방부 인민위원(국방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승진하고 1940년 소련 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소련-핀란드 전쟁(겨울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 전쟁 초기의 지휘 부진으로 실각하였다. 1941년 말 포병총국장에서 해임되었고, 1942년 군사 법정에서 소장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스탈린과의 각별한 관계 덕분에 다른 패전 장군들과 달리 총살형은 면하였다.

전후 스탈린과 라브렌티 베리야가 주도한 새로운 숙청 과정에서 쿨리크는 1947년 반역죄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50년 처형되었다.

쿨리크는 정치적으로 스탈린의 신뢰를 받았으나 군사적 판단력은 부족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전쟁 직전 무기 생산과 군사 교리 결정 과정에서의 그의 보수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는 소련군의 전쟁 준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 일부 연구자들은 그와 보로실로프가 당시 붉은 군대의 실질적 전력 수준에 비추어 과도하게 진보적인 작전 이론(심층 작전)의 시행을 경계한 점은 부분적으로 타당했다는 견해도 제시한다.

한편, 쿨리크의 처형 이후 그의 명예는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 시기에 회복되었다.

(본 항목은 위키백과 및 국제 사전류의 공신력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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