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니코스 전투는 기원전 334년 5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가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과 벌인 전투로,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 중 치러진 세 번의 주요 격전 중 첫 번째 전투이다.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국내 통합을 공고히 하고 기원전 334년 아시아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세스토스에서 아비도스로 향하는 항로를 이용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으며, 이후 그라니코스 강(오늘날 터키의 비가 차이, Biga Çayı) 인근에서 페르시아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전투 장소는 트로이 유적이 있던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 부근이다.
페르시아 측에서는 소아시아의 여러 사트라프(태수)들이 제레아 마을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페르시아 지휘관 중 로도스의 멤논은 보급품을 불태우고 후퇴하는 청야전술을 제안했으나, 지휘권을 가진 태수들이 이를 거부하고 강둑에서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정하였다.
전투 경과
페르시아군은 기병을 보병 앞에 배치하고 그라니코스 강 동쪽 둑에 병력을 정렬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의 부사령관 파르메니온은 강 상류에서 건너 다음 날 새벽 기습을 가할 것을 제안했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즉각적인 공격을 선택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은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를 중앙에 배치하고 기병을 양측면에 배치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컴패니언 기병(Companions)과 함께 우익에 위치하였다. 전투는 파르메니온 휘하의 좌익 기병대가 양동작전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군이 좌익 공격에 대응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쐐기꼴 돌격을 시도하여 페르시아군 전열의 중앙부를 강타하였다.
전투는 격렬한 혼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스피트리다테스라는 페르시아 귀족에게 도끼로 공격을 받아 기절할 뻔했으나, 스피트리다테스가 클레이토스의 공격으로 전사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이후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측면 공격과 보병대의 돌격으로 페르시아 기병대와 보병대가 궤주하면서 전투는 마케도니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결과 및 영향
마케도니아군의 총 사상자는 약 300명에서 400명 사이로 기록되었으며, 페르시아군은 기병 약 1,000명과 보병 약 3,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 고용되어 남아 있던 그리스 용병대에 대해 학살 명령을 내렸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약 18,000명의 용병이 사망하고 2,000명이 노예로 보내졌다.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의 미트라다테스, 로에사케스, 스피트리다테스 등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했고, 아르시테스는 도주에 성공했으나 이후 자살하였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이 전투의 승리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들을 교두보로 삼아 이후 페르시아 제국 정복 원정을 계속 진행하였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이후 이수스 전투에서야 알렉산드로스와 직접 대결하게 되었다.
사료 및 해석
이 전투에 대해서는 아리아노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 사료가 각각 상이한 수준의 상세함으로 기록을 남겼으며, 특히 아리아노스의 기록이 가장 세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군의 배치가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한다. 일부는 페르시아군의 전술적 실책으로 평가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페르시아군이 기병의 수적 우위를 이용하려 한 계획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역사가 피터 그린은 고대 사료의 서술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학계의 일부 이론에 해당한다.
그라니코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정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로, 고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투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