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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

균여(均如, 923~973)는 고려 전기의 승려이다. 속성(俗姓)은 변(邊)씨이며,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변균여(邊均如)라고도 불린다. 법계(法階)는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에 이르렀으며, 원통대사(圓通大師)로도 칭해진다.

생애

균여는 923년(고려 태조 6) 황해도 황주 북쪽 형악(荊岳) 남쪽 기슭의 둔대엽촌(遁臺葉村)에서 아버지 변환성(邊煥性)과 어머니 점명(占命) 사이에서 태어났다. 《균여전》에 따르면 어머니가 60세에 임신하여 7개월 만에 낳았으며, 얼굴이 매우 못생겨 부모가 거리에 버렸으나 까마귀가 날개로 아이를 덮어주는 것을 보고 다시 데려다 길렀다는 탄생 설화가 전해진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화엄경》의 원만게(圓滿偈)를 전수받았으며, 15세가 되던 937년에 사촌형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영통사(靈通寺)의 의순(義順)에게 나아가 화엄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953년(광종 4) 후주(後周) 사신이 광종을 책봉하는 의식에서 비가 계속 내리자 국사 겸신(謙信)의 천거로 기청제(祈晴祭)를 주관하여 날씨가 개었고, 이에 광종이 균여에게 아홉 번 절하는 예를 갖추고 대덕(大德)에 봉하였다. 이후 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불교 정책과 왕권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58년(광종 9)에는 승시(僧試)의 시관이 되어 유능한 승려를 선발하였고, 963년(광종 14) 광종이 송악산 아래에 창건한 귀법사(歸法寺)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 귀법사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빈민 구제와 사회복지 사업을 펼쳤다. 973년(광종 24) 6월에 입적하였으며, 팔덕산(八德山)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화엄종 통합과 사상

신라 말기 화엄종은 관혜(觀惠)의 남악파(南岳派)와 희랑(希朗)의 북악파(北岳派)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었다. 균여는 북악파의 법통을 계승하였으나, 수좌 인유(仁裕)와 함께 명산과 사찰을 편력하며 양파의 통합에 힘썼다. 그의 화엄사상은 '성상융회(性相融會)'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공(空)을 뜻하는 성(性)과 색(色)을 뜻하는 상(相)을 융합시키는 이론으로 교종 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통합 사상이었다. 또한 전통적인 화엄 법계관을 횡진법계(橫盡法界)와 수진법계(豎盡法界)로 나누어 이를 융회한 '주측(周側)'을 주장하였다.

저술

균여는 화엄학의 거장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 《공목장기(孔目章記)》 8권, 《오십요문답기(五十要問答記)》 4권, 《탐현기석(探玄記釋)》 28권,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10권,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등이 있다. 이들 저술 중 일부는 해인사 고려대장경 보판(補板)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보현십원가와 문학적 업적

균여는 불교 대중화를 위해 향찰(鄕札)로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원명: 보현십종원왕가) 11수를 지었다. 이는 보현보살의 십종원(十種願)을 주제로 한 10구체 향가로, 《예경제불가》, 《칭찬여래가》, 《광수공양가》, 《참회업장가》, 《수희공덕가》, 《청전법륜가》, 《청불주세가》, 《상수불학가》, 《항순중생가》, 《보개회향가》, 《총결무진가》로 구성되어 있다. 이 향가는 최행귀(崔行歸)에 의해 한시로 번역되었으며, 한국 국문학사와 불교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균여전》

균여의 생애와 행적은 그가 입적한 지 약 100여 년 후인 1075년(문종 29)에 진사 혁련정(赫連挺)이 찬술한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약칭 《균여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전기는 강탄영험분, 출가청익분, 자매제현분, 입의정종분, 해석제장분, 감통신이분, 가행화세분, 역가현덕분, 감응항마분, 변역생사분의 10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후 평가

고려 중기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균여의 사상을 '교(敎)만 있고 관(觀)이 없다'고 비판하며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그의 저술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조계종이 부흥하면서 균여의 화엄사상이 재조명되었고, 재조대장경(해인사 대장경)에 그의 저술이 포함되어 전승되었다. 제자는 3,000인에 이르렀으며, 담림(曇琳)과 조(肇) 등이 대표적인 제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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