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權韠, 1569년~1612년)은 조선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시인, 성리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권씨이며,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다.
생애 서인(西人) 계열의 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이며, 권벽(權擘)과 경주 정씨 사이의 5형제 중 막내아들이다. 송강 정철(鄭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세에 과거 초시와 복시에 장원하였으나, 글자 하나를 잘못 적은 일로 축방(黜榜)당한 이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방랑하며 시주(詩酒)로 자오(自娛)하였다.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동몽교관(童蒙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강화도에서 유생들을 가르쳤다. 1602년(선조 35)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으로 참여하였고, 1606년(선조 39)에도 한강 접빈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주전론(主戰論)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광해군 초, 권신 이첨(李爾瞻)이 가까이 지내길 청했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임숙영(任叔英)이 과거 시험에서 권신 유희분(柳希奮) 등을 공격했다가 삭과(削科)당한 일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였다. 이로 인해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고, 1612년 김직재의 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과의 관련이 밝혀져 전라도 해남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귀양길에 오르던 중 동대문 밖에서 폭음한 후 이튿날 44세로 사망하였다.
문학적 특징 당대 문단에서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이재(二才)'로 불리며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문학적 전성기를 이끌었다.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호방하였으며, 중국 당나라 시풍의 낭만적 서정과 당대 현실을 풍자한 사회성 높은 시를 많이 남겼다.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풍자한 작품이 주목할 만하다.
저서
-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
- 시문집 『석주집(石洲集)』
사후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전라남도 광주 운암사(雲巖祠)에 모셔졌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으며, 묘갈(墓碣)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강화군에는 석주권필유허비가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