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득인(權得仁, 1805년 ~ 1839년 5월 24일)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자 순교자로,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며, 축일은 9월 20일이다.
생애
권득인은 1805년 서울의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그가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났고, 독실한 신자였던 모친 역시 그가 16세 되던 해에 사망하여 일찍부터 가난한 생활을 겪었다. 어머니가 보여준 신앙적 모범은 그가 성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매일 새벽 수탉이 울기 전에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인물로 알려졌다.
결혼 후 그는 처음에는 약제상에서 일했고, 이후 소규모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후 사직골과 너리골 등으로 이주하면서 십자고상과 성패(聖牌) 등 성물을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하였으며, 이를 생계 수단이자 전교 활동의 방편으로 삼았다. 가난했음에도 불평하지 않았고, 교회에 헌금하기 위해 성물 제작을 지속하였다. 30세 무렵부터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고,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에는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기해박해와 순교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자 권득인은 그해 1월 16일(음력 1838년 12월 2일) 아내, 처남, 어린 자녀, 그리고 김노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포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한편 그의 아내와 처남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여 석방되었는데, 옥중에 남은 권득인은 이들에게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보내 마음을 돌리도록 격려하였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죄목 가운데 하나는 종교 물품을 만들어 판 사실이었다.
그는 약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839년 5월 24일(음력 4월 12일) 35세의 나이로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광헌, 남명혁 등 여덟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斬首刑)을 받아 순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목이 떨어질 때까지 그의 얼굴에는 신비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시복·시성
권득인 베드로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福者) 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 여의도에서 집전한 103위 시성식에서 성인(聖人) 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이다.
관련 기록·자료
권득인의 삶과 순교 과정은 《기해일기》, 《승정원일기》 등과 같은 당대 사료와 《달레 교회사》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시복·시성 이후에는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천주교회 103위 순교성인 생애 자료집 등 다양한 가톨릭 관련 출판물에서 다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