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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브란 룬데

굴브란 오스카르 요한 룬데(Gulbrand Oscar Johan Lunde, 1901년 9월 14일 ~ 1942년 10월 25일)는 노르웨이의 화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의 친독 협력 정권인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생애 초기 및 화학 경력

룬데는 1901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시기의 베르겐(Bergen)에서 건축가 지그루드 룬데(Sigurd Lunde)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ETH Zürich)과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5년 독일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오슬로 대학 화학과에 취직했고, 1929년에는 교수직 제의를 두 차례 거절한 채 스타방에르(Stavanger)에 위치한 통조림 산업 연구소(Hermetikkindustriens Laboratorium)의 소장이 되었다. 그는 노르웨이 통조림 산업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생화학과 비타민에 관한 다수의 과학 논문을 저술했다.

정치 활동

룬데는 크비슬링의 강력한 지지자로 빠르게 부상했으며, 크비슬링의 정당인 국가연합(Nasjonal Samling)의 초기 창당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33년 스타방에르에서 국가연합 창당에 참여했고, 같은 해 가을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룬데는 국가연합의 대표적 연설가 중 하나였으며 효율적인 행정가로 평가되었다. 1934년에는 스타방에르에서 시의회 대표로 선출되었고, 1935년에는 국가연합의 선전 책임자가 되어 다수의 저술과 출판물을 집필했다. 1936년 선거에서 국가연합이 부진한 성적을 거둔 이후에는 업무와 가족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활동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고 크비슬링이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룬데는 제1차 크비슬링 내각에서 사회부 장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직위를 거절했다. 쿠데타는 6일 만에 실패했으며, 이후 테르보벤(Josef Terboven)이 노르웨이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으로서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1940년 9월 25일, 테르보벤은 노르웨이의 모든 정당을 금지하고 국가연합만을 허용한 뒤, 11명의 국가연합 구성원을 임시 국무위원(commissariske statsråder)으로 임명했다. 룬데는 이날 문화·공보 담당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9월 25일에는 그 직함이 "장관"으로 격상되었고, 1942년 2월 1일 크비슬링 협력 정권이 공식 출범하면서 룬데는 계속해서 문화·공보 장관으로 재임했다.

문화·공보 장관으로서 룬데는 노르웨이의 지적 생활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는 강연과 연설을 통해 바이킹 시대에서 자신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문화사적 연속성을 강조하며 노르웨이 민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고자 했다. 학자 군나르 스키르베크(Gunnar Skirbekk)에 따르면, 독일 정보 보고서는 나치 독일 정부가 룬데의 "북게르만 민족(Norse)" 강조가 독일 나치당이 선호하던 보다 광범위한 "게르만 민족(Germanic peoples)" 개념과 맞지 않아 그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1942년 9월, 룬데는 국가연합의 준군사조직 히르덴(Hirden) 음악 부서의 지도자와 함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에른스트 글라저(Ernst Glaser)를 만나 노르웨이에서 일어나는 홀로코스트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스웨덴으로의 이동을 준비해 주었다.

사망

1942년 10월 25일 저녁 8시 30분, 룬데와 그의 아내 마리(Marie), 그리고 베르겐-호르달란의 주지사 크리스티안 아스트루프(Christian Astrup)는 올레순(Ålesund)에서 자동차로 출발해 롬스달스피오르(Romsdalsfjord)를 건너는 페리 여정에 올랐다. 자동차가 바게(Våge)의 페리 부두에 도착했을 때, 운전자는 차에서 내렸고, 페리가 부두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엔진을 켰지만 오히려 해안에서 멀어져 차가 앞으로 굴러 5미터 깊이의 물속으로 빠졌다. 아스트루프는 가라앉는 차에서 탈출했으나 룬데와 그의 아내는 익사했다.

이 사건은 의심스러운 정황으로 조사되었으나 당시에는 사고로 결론 내려졌다. 그러나 암살설이 유포되었고, 2012년에 출판된 룬데 전기(Triumf og tragedie)는 그의 죽음이 좁은 의미의 "북게르만 전통"에 집중한 그를 제거하려는 독일 측의 사주로 이루어진 암살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룬데의 후임으로 롤프 예르겐 푸글레상(Rolf Jørgen Fuglesang)이 문화·공보 장관직을 승계했다.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Gulbrand Lunde"
  • 노르웨이 백과사전(SNL), "Gulbrand Lu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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