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일본어: 国学, Kokugaku)은 에도 시대 중반부터 발흥한 일본의 학문 운동이자 학파로, 문자 그대로 '국가의 학문' 또는 '국수(國粹)적 학문'을 의미한다. 당시 일본 학계를 지배하던 중국 유학(한학, 漢學)과 불교 중심의 외래 사상에 대항하여, 일본 고유의 문화, 사상, 정신을 일본의 고전과 고대사에서 재발견하고자 한 학문적 흐름이다. 영어로는 'National Learning', 'Native Studies', 'Nativism' 등으로 번역된다.
기원과 배경
국학의 기원은 17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언종 승려였던 게이추(契沖, 1640~1701)는 《만요슈(万葉集)》에 대한 주석서 《만요다이쇼키(万葉代匠記)》에서 중세 가학(歌學)의 비전주의를 배격하고, 객관적인 문헌학적 방법론을 통해 고전을 해석하는 새로운 연구 방법을 확립하였다. 이는 국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국학이 하나의 학파로서 체계화된 것은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満, 1669~1736)에 의해서였다. 그는 《창학교계(創学校啓)》(1728)에서 일본 고유의 '신황(神皇)의 가르침(古道)'이 유교와 불교의 성행으로 쇠퇴하고 있음을 우려하며, 고어(古語) 연구를 통해 고의(古義)를 밝히고 이를 통해 고대의 도(道)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개와 주요 학자
국학은 크게 네 단계에 걸쳐 발전하였다.
제1기(선구기)는 게이추와 시모코베 조류(下河辺長流) 등이 만요슈 연구를 통해 문헌학적 방법론을 확립한 시기이다.
제2기(형성기)는 가모노 마부치(賀茂真淵, 1697~1769)가 활동한 시기이다. 마부치는 《만요코(万葉考)》를 비롯한 저작에서 만요슈 연구를 통해 고대 일본인의 '명(明)하고 청(清)하고 직(直)한'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는 '고도설(古道說)'을 제창하였다. 그는 중국 문화의 유입 이전 일본이 '천지(天地)의 마음에 따라' 다스려진 이상적인 자연 상태였다고 보았다.
제3기(완성기)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에 의해 국학이 집대성된 시기이다. 노리나가는 반평생을 바쳐 《고지키(古事記)》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 《고지키덴(古事記伝)》(1798 완성)을 저술하였다. 그는 게이추의 문헌학적 방법과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고문사학(古文辞学) 방법론을 계승·발전시켜, 고대 일본어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고대 일본의 '도(道)'를 재구성하였다. 노리나가는 문학론에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 개념을 정립하여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비롯한 고전 문학을 도덕적·교훈적 해석에서 해방시켰으며, 언어학 분야에서도 한자음, 가나 사용법, 조사(てにをは), 용언 활용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해 오늘날 국어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일본 고유의 도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도'이자 '천황(天皇)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라고 규정하였다.
제4기(대중화·이데올로기화)는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에 의해 주도되었다. 아쓰타네는 노리나가의 문헌 실증주의를 벗어나, 고대 전승을 재편집한 《고시세이분(古史成文)》을 편찬하고, 사후 세계와 영혼의 문제를 교의에 포함시켜 국학을 종교적 색채가 강한 '복고신도(復古神道)'로 변질시켰다. 그는 일본이 만국의 근본이 되는 나라이며, 천황이 만국의 종주라고 주장하는 배타적 국수주의를 강화하였다. 아쓰타네의 문하에서는 막말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에 참여한 많은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방법론과 특징
국학의 방법론은 문헌학적 실증주의에 기반하였다. '고어(古語)에 통하지 않으면 고의(古義)가 밝혀지지 않고, 고의가 밝혀지지 않으면 고대의 도(道)를 알 수 없다'는 인식 아래, 고전 텍스트의 정밀한 비판과 해석을 중시하였다. 이는 동시대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斎)의 고의학(古義学)과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古文辞学)의 방법론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국학은 유교와 불교의 도덕관념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한다고 비판하고, 인간의 솔직한 감정과 자연스러운 표현을 중시하는 주정주의(主情主義)적 인간관을 특징으로 하였다.
역사적 영향
국학의 사상은 막말 존왕양이 운동과 도막(倒幕) 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메이지 유신(1868)의 사상적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국학은 국가 신도(國家神道)의 형성에 기여하였고, 천황 중심의 국체(國體) 이념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국학은 학계에서 일시적으로 금기시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일본인론(日本人論, Nihonjinron)'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는 담론 속에서 그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다.
학문적 의의
국학이 축적한 많은 연구 성과는 근대 이후의 국문학, 국어학, 국사학의 기초가 되었다. 게이추의 문헌학, 노리나가의 고전 주석, 그리고 여러 국학자들의 언어 연구는 오늘날 일본 인문학의 방법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국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편협한 배타 사상을 확산시킨 측면도 있어, 학문으로서도 사상으로서도 극복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