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국제파(國際派)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중국공산당(CCP) 내부에서 모스크바 중산대학(해당대학) 유학 경험이 있고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침과 소련의 노선에 충실했던 파벌을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이다. 한국 학계 및 중국 현대사 연구에서는 흔히 '28인의 볼셰비키(二十八个半布尔什维克)'로 대표되는 왕밍(王明) 그룹, 보구(博古), 장원톈(张闻天) 등을 핵심 세력으로 본다.
역사적 배경 및 형성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소련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이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한 중국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당내 지도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현실보다는 코민테른의 이론과 스탈린의 노선(도시 폭동 노선, 노동자 계급 주도권 등)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려 했다.
주요 활동 및 노선
- 왕밍 노선(王明路线) 지도: 1931년 1월 제4차 전원회의(닝두 회의) 이후 왕밍이 당 총서기격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고, 보구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는 등 당 중앙 지도부를 장악했다.
- 좌경 모험주의(左倾冒险主义): 농촌 기지(근거지) 방어를 소홀히 하고 대도시 공격 및 정규전 위주의 군사 노선을 고집했으며, 마오쩌둥(毛泽东)의 농촌 포위 도시 노선과 유격전술을 '우경 기회주의'로 비판하며 배제했다.
- 제5차 반'토벌' 전쟁 실패: 국제파의 지휘 하에 홍군은 장제스(蒋介石)의 제5차 포위 토벌전에서 정규전 위주로 대응하다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이로 인해 장정(长征)을 떠나게 되었다.
쇠퇴와 전환 (쭌이 회의) 1935년 1월 쭌이 회의(遵义会议)에서 국제파의 군사 지휘권(보구, 오토 브라운/리더)이 박탈되고, 마오쩌둥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복귀하며 군사 결정권을 장악하면서 국제파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장원톈은 총서기 직을 마오쩌둥에게 넘겼으나(명목상), 실질적 권력은 마오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행보
- 왕밍: 항일전쟁 시기 통일전선 노선(우경 타협주의 비판을 받음)을 주도하다가 옌안 정풍 운동(延安整风运动) 과정에서 비판받고 권력에서 멀어졌다. 해방 후 소련으로 가 사망했다.
- 장원톈: 쭌이 회의 후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으며, 건국 후 외교부장, 주소련 대사 등을 역임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 박해받다 사망, 사후 복권되었다.
- 보구: 쭌이 회의 후 2선으로 물러났으며, 건국 후 국가기계위원회 주임 등 기술 관료직을 맡았다.
역사적 평가 중국공산당 공식 사료(《중국공산당 역사》 등) 및 마오쩌둥 주도의 당사 서술에서는 국제파를 '좌경 교조주의(左倾教条主义)', '왕밍 좌경 모험주의 노선'의 주체로 규정하며, 당과 홍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 오류로 비판한다. 반면, 일부 현대 연구자들은 이들이 코민테른의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략 하에서 중국 혁명을 추진하려 했던 '국제주의자'적 성격을 가졌으며, 당내 민주주의와 이론 투쟁의 일면도 있었다고 재조명하기도 한다.
참고 사항
- '국제파'라는 명칭은 마오쩌둥파(옌안파/농민파)에 대비하여, 소련/코민테른과의 연계성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 노선을 중시했다는 의미에서 후대 연구자들과 당사 서술에서 편의상 붙여진 호칭이다. 당사기 당시 자신들을 '국제파'라 부르기보다 '중앙(임시중앙/중앙특파원)' 또는 '코민테른 노선 옹호자'로 자칭했다.
- 1920년대 말 '리리싼 노선(李立三路线)' 시기의 지도부(리리싼, 저우언라이 등)와 구별하여, 1931년 이후 왕밍·보구 그룹을 구체적으로 '왕밍 그룹' 또는 '국제파'로 분류하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