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쓰키 모토쓰나(일본어: 朽木 元綱, 1549년? ~ 1632년 7월 24일)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武將)이자 다이묘(大名)이다. 구쓰키 씨(朽木氏) 제13대 당주이며, 에도 막부 성립 후 단바 국 후쿠치야마 번(福知山藩), 히타치 국 쓰치우라 번(土浦藩)을 거쳐 오미 국 구쓰키 번(朽木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생애
- 출생과 가문: 오미 국 구쓰키(현재의 시가현 다카시마시 구쓰키 지역)의 호족 구쓰키 씨의 당주 구쓰키 다네쓰나(朽木 稙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고마쓰마루(小松丸), 통칭은 주부(主部) 또는 사콘에노조(左近衛尉)이다. 관위는 종오위하(從五位下) 단바노카미(丹波守).
- 아자이 가문 섬김과 오다 가문 귀속: 초기에는 오미의 센고쿠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를 섬겼다. 1573년(덴쇼 1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키자, 모토쓰나는 노부나가에게 귀순하여 구쓰키 영지 5,000석을 안도받았다.
- 도요토미 정권 하의 활약: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겼다. 1585년(덴쇼 13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1587년(덴쇼 15년) 규슈 정벌,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 등에 종군했다. 1592년(분로쿠 1년)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에는 히젠 국 나고야 성(名護屋城)에 주둔하며 후방 지원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공적으로 1595년(분로쿠 4년) 단바 국 후쿠치야마 1만 8,000석으로 가봉되어 다이묘 반열에 올랐다.
- 세키가하라 전투와 에도 막부 성립: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측(동군)에 가담하여, 서군 측의 다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 등이 지키는 오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공격 등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전후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으며, 1607년(게이초 12년) 히타치 국 쓰치우라 2만 8,000석으로 전봉되었다.
- 구쓰키 번 수립과 말년: 1614년(게이초 19년) ~ 1615년(게이초 20년) 오사카 전투(大坂の陣)에서는 도쿠가와 방면에서 출전했다. 1619년(겐나 5년) 조카이자 양자인 구쓰키 다네쓰나(朽木 稙綱, 둘째 아들 다네요시의 아들)에게 쓰치우라 번을 물려주고, 자신은 고향인 오미 구쓰키 3만 2,000석(후에 3만 5,000석)으로 영지를 옮겨 구쓰키 번을 세워 초대 번주가 되었다. 1632년(간에이 9년) 6월 13일(음력) 구쓰키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4세(또는 83세).
인물·일화
- 구쓰키 씨는 예부터 오미의 지방 호족으로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으며, 모토쓰나는 격동의 센고쿠 시대를 아자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라는 네 명의 천하인(天下人)을 섬기며 가문을 보전하고 다이묘로 출세시킨 생존 전략가로서 평가받는다.
-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서군 측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가 모토쓰나에게 동참을 권유했으나, 모토쓰나는 "구쓰키 가는 대대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 왔다. 이제 와서 주군을 바꿀 수 없다"며 거절하고 동군에 가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단, 실제로는 이에야스와의 관계성 및 영지 보전 등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견해가 강하다).
- 번정(藩政) 면에서는 구쓰키 번의 기초를 다지는 데 힘썼으며, 검지(検地) 실시, 촌락 정리, 조카마치(성하 마을) 정비 등을 추진했다.
가계
- 아버지: 구쓰키 다네쓰나(朽木 稙綱)
- 형: 구쓰키 노부쓰나(朽木 信綱, 조기 사망)
- 정실: 이나가키 나가시게(稲垣 長茂)의 딸
- 자녀: 구쓰키 다네요시(朽木 稙好, 장남), 구쓰키 가쓰쓰나(朽木 勝綱) 등
- 양자(조카): 구쓰키 다네쓰나(朽木 稙綱, 2대 번주, 다네요시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