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루치오 2세(라틴어: Luc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Lucio II)는 가톨릭교회의 제166대 교황으로, 1144년 3월 9일부터 1145년 2월 15일까지 재위하였다. 세속명은 게라르도 카차네미치 달 오르소(Gherardo Caccianemici dal Orso)이다.
생애 초기
루치오 2세는 교황령 볼로냐에서 오르소 카차네미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교황직에 오르기 전 오랜 기간 루카의 산 프레디아노 성당(바실리카 디 산 프레디아노)에서 의전사제(참사회원)로 봉사하였다. 1124년 교황 호노리오 2세에 의해 예루살렘의 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해당 성당을 개축하고 의전사제단을 부설하였으며 수익을 개선하였다. 훗날 교황이 된 후에는 금판과 보석으로 장식한 복음서, 제대보, 은제 성유 그릇 등을 이 성당에 하사하였다.
호노리오 2세는 그를 로마 교구의 도서관 사서로 임명하였고, 1125년에는 교황 특사로 독일에 파견하였다. 독일에서 그는 로타르 3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을 지지하였으며, 크산텐의 노르베르토(성 노르베르토)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로 임명되는 데 기여하였다. 1128년에는 전임 총독이 축출된 베네벤토를 통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130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다시 독일 특사로 임명되었으며, 로타르 3세가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에 맞서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보호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두 차례 원정을 감행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135년부터 1136년까지도 독일에서 교황 특사로 활동하였다. 몬테카시노의 수도사들이 교황 권위에 복종하도록 로타르 3세와 협상하는 주요 협상자 중 한 명이었으며, 살레르노로 파견되어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 및 시칠리아 국왕 루지에로 2세와 교회 분열 종식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교황청 상서국장(총리)에 임명하였다.
1144년 교황 선거에서 제라르도가 선출되어 1144년 3월 12일 즉위하였다. 교황명은 즉위 며칠 전에 기념된 교황 루치오 1세의 이름을 따라 루치오 2세로 채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 재위
잉글랜드 및 포르투갈과의 관계
루치오 2세는 중세 기독교 세계의 통상적인 교회 운영에 관여하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여러 주교와 수도원, 성당에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성 에드문도 수도원을 세속 권위로부터 면제시켰다. 교황 특사 힌크마를 잉글랜드에 파견하여 세인트데이비스 주교 버나드의 관구장 주교 승격 요청을 검토하게 하고, 요크 대주교 윌리엄에게 팔리움을 전달하게 하였다. 잉글랜드의 정치적 상황에 관해서는 무정부 상태(더 애너키)에서 마틸다 황후의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지지하였다.
재위 초반, 루카 시의 저명 인사들이 루카와 피사 간의 전쟁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의 영주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치오 2세는 1144년 3월 18일 금화 10파운드를 받고 이를 수락하였으며, 전쟁 종료 후 성을 그들에게 반환하였다.
포르투갈에서는 아폰수 1세 국왕이 레온 왕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교황에게 봉건적 주종 관계를 맺고 충성 맹세를 제안하였다. 루치오 2세는 1144년 5월 1일 아폰수 1세의 봉건적 경의를 수락하고 직접 로마 방문을 면제해 주었으나, 그를 '포르투갈의 왕'이 아닌 '포르투갈의 지도자'(Dux Portugallensis)로 인정하였다. 포르투갈 국왕 칭호는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공식 부여되었다.
시칠리아 국왕 루지에로 2세와의 갈등
루치오 2세는 사적으로 시칠리아 국왕 루지에로 2세의 친구이자 그의 자녀 중 한 명의 대부였으나,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144년 6월 체프라노에서 회동하여 루지에로 2세가 교황청의 봉신임을 재확인하는 자리에서, 루치오 2세는 카푸아 공작령의 교황령 반환을 요구하였고, 루지에로 2세는 그 대가로 교황령 남부 일부를 요구하였다. 추기경들의 조언에 따라 루치오 2세가 이를 거절하자, 루지에로 2세는 아들인 아풀리아 공작 루지에로 3세에게 캄파니아 침공을 지시하였다. 시칠리아 군대는 페렌티노까지 북진하였고, 로마는 굴복하였다. 1144년 9월 루치오 2세는 7년 간의 휴전 조건을 수용하였고, 노르만군은 정복한 영토로 후퇴하고 베네벤토 등 교황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로마 코뮌의 출현과 최후
루치오 2세가 시칠리아에 굴복한 것을 계기로 로마 원로원은 교황의 세속 권력을 박탈하고 공화정 수립을 시도하였다. 이 운동의 주요 참여층은 상인과 수공업자였으며, 도시 귀족들은 중립을 지켰다.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의 형제인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의 주도로 원로원은 교황이 임명한 대표자들을 축출하고 로마 코뮌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교황이 모든 통치권을 포기하고 교회세와 자발적 공물만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루치오 2세는 루지에로 2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이어 로마왕 콘라트 3세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도 콘라트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콘라트 3세의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루치오 2세는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였다. 로마 귀족 가문인 프란지파니 가문에 의지하여 1145년 1월 31일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요새를 그들에게 넘겨주고 팔라티노 언덕 남부를 통제하게 하였다.
최종적으로 루치오 2세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캄피돌리오(카피톨리노 언덕)의 원로원 진영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2세기 연대기 작가 비테르보의 고드프리에 따르면, 그는 이 전투에서 돌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1145년 2월 15일, 인근 프란지파니 요새의 보호를 받던 산 그레고리오 마뇨 알 첼리오 성당에서 선종하였다. 시신은 라테라노 대성전의 후진 뒤쪽 원형 포르티코에 안장되었다.
평가
루치오 2세의 재위 기간은 약 11개월로 매우 짧았으나, 로마 코뮌의 대두와 시칠리아 왕국과의 갈등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들이 집중된 시기였다. 교황으로서 그는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등지의 교회 문제에 관여하는 한편, 로마 내에서는 교황의 세속 권력을 위협하는 공화주의 운동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의 문장(헤럴딕 배지)은 은색 방패에 검은색 곰이 일어서 있는 형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