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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0세

교황 레오 10세(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1475년 12월 11일 ~ 1521년 12월 1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17대 교황(재위: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이다. 본명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로,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명문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출생과 초기 생애

레오 10세는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와 클라리체 오르시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렌초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성직자의 길을 걸었으며, 7세에 탁발례를 받고 13세가 되던 1489년 3월 8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이는 아버지 로렌초가 교황과의 정략적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489년부터 1491년까지 피사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였고, 1492년 3월 정식으로 추기경단에 들어갔다.

1494년 프랑스군의 침공과 사보나롤라의 선동으로 피렌체 시민들이 봉기하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고, 조반니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였다. 1500년 로마로 돌아와 예술과 문학에 심취하며 지냈다. 1503년 형 피에로가 전사하면서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1511년 볼로냐와 로마냐의 교황 특사로 임명되었고, 1512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교황 선출

1513년 3월 9일, 조반니는 전임 교황 율리오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3월 15일 사제 수품을 받고 17일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19일 즉위식을 통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그는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선출된 마지막 교황이다.

재위 기간의 주요 사건

레오 10세의 재위는 정치적 혼란, 전쟁, 예술 후원, 그리고 종교개혁의 발발이라는 결정적 사건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치와 전쟁: 전임 교황 율리오 2세 시기부터 이어진 캉브레 동맹 전쟁이 계속되었다. 레오 10세는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으나,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패배하여 밀라노를 내주었다. 1516년에는 우르비노 전쟁을 일으켜 조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를 우르비노 공작으로 앉혔으나, 이 전쟁은 막대한 재정 손실을 초래하였다. 1517년에는 일부 추기경들이 교황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고, 이를 계기로 레오 10세는 한 번에 31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종교개혁: 레오 10세의 재위 중 가장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은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발발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대사) 판매를 승인하였고, 이에 반발한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다. 레오 10세는 초기에는 사태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으나, 1520년 교황 칙서 《주님,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통해 루터의 주장을 41개 항목으로 반박하였고, 1521년 1월 3일 칙서 《로마 교황의 선언》(Decet Romanum Pontificem)으로 루터를 공식 파문하였다.

예술과 학문의 후원: 레오 10세는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예술 후원자였다.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하였으며, 라파엘로에게 바티칸 궁전의 장식을 맡기고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계속 추진하였다. 또한 로마 대학(사피엔차 대학)을 개혁하고 그리스어 인쇄소를 설립하는 등 학문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반면 그의 사치스러운 소비와 예술 후원은 교황청 재정을 파탄으로 이끌었으며, 전임 교황 율리오 2세가 남긴 재산을 2년 만에 소진하고 막대한 빚을 남겼다.

사망

1521년 10월 25일 말라리아에 걸린 레오 10세는 병세가 악화되어 1521년 12월 1일 4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의 사망은 교황군이 밀라노를 프랑스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유해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안치되었다.

평가

레오 10세는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로서 르네상스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 반면, 사치와 재정 낭비, 면죄부 판매를 통한 종교개혁 촉발, 정치적 기회주의 등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그의 저서 《영웅숭배론》에서 레오 10세에 대해 "그리스도 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도였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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