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서사건(掛書事件)은 조선 시대에 익명으로 작성된 게시문(괘서, 掛書)을 여러 사람이 보는 공공장소에 붙여 정부를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함으로써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괘서는 벽서(壁書)라고도 불리며, 대부분 작성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익명서 형태였다.
정의 및 성격
괘서(掛書)는 '걸다'는 뜻의 '괘(掛)'와 '글'을 뜻하는 '서(書)'의 합성어로,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할 목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이다. 조선 왕조에서는 괘서를 엄격히 규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괘서사건은 대중매체가 없던 시대에 정치적 현실을 알리는 정보 전달 수단이자, 소극적 형태의 사회 항쟁 양상으로 평가된다.
주요 괘서사건
조선 후기, 특히 영조·정조 연간에 괘서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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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괘서사건(1733년, 영조 9년): 무신란(이인좌의 난, 1728) 이후 각종 비기류(祕記類)가 유포되던 가운데 남원에서 발생하였다. 훈장 곽처웅(郭處雄) 등이 승려 태진(太眞)에게서 비기를 받아 전파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곽처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괘서에는 성인의 출현과 대동세계(大同世界)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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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괘서사건(1755년, 영조 31년): 조선 후기 가장 대표적인 괘서사건으로,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불린다. 나주 객사 망화루(望華樓) 벽에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 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괘서가 붙었다. 주모자 윤지(尹志)는 소론계 인사로, 노론과 영조에 대한 불만을 품고 필묵계(筆墨契)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 사건으로 소론계 인사 약 500명이 처형되거나 숙청되었으며, 영조의 탕평책이 붕괴되고 노론 일당 체제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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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괘서사건(1748년, 영조 24년): 충청도 문의(현재의 청주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괘서의 내용이 퍼지면서 지역 주민들이 대거 피난을 가는 등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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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괘서사건(1801년, 순조 1년): 하동괘서사건과 함께 영남괘서사건으로 통칭된다. 전지효(田志孝)가 주도하여 세 차례에 걸쳐 괘서를 붙였으며, '천하의 지모와 힘이 있는 자는 따르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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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 괘서사건(1826년, 순조 26년): 청주성 북문과 관아에 괘서가 걸린 사건으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秘記)를 이용하여 조선 왕조의 멸망론을 주장하고 홍경래(洪景來)가 살아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역사적 의의
괘서사건은 조선 후기 사회의 불안정성과 민중의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현상이다. 특히 18세기 영조·정조 시기는 이인좌의 난(1728) 이후 각종 비기류와 예언서(『정감록』, 『남사고비결』 등)가 유포되면서 괘서사건이 빈발하였다. 괘서는 기존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과 사회 변혁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으며, 당시 향촌 사회의 분위기와 하층민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또한 괘서사건은 조정의 정치적 대립과 숙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