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재진입 작전(光州再進入作戰)은 1980년 5월 27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신군부 수뇌부가 계엄군을 투입하여 전남도청에서 항전 중이던 광주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 작전이다. 계엄군 측의 공식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尙武忠正作戰)이다.
배경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 확대를 계기로 시작된 광주 민주화 운동은 5월 21일 전남도청 집단발포 사건 이후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일시적인 '시민 자치' 국면을 맞았다. 계엄군은 5월 21일부터 광주 외곽을 봉쇄하는 광주외곽봉쇄작전을 펼쳤고, 시민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어 군부와의 협상 및 치안 유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강경 진압 방침을 고수했다.
작전 수립 과정
1980년 5월 23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진종채 2군사령관으로부터 광주 재진입 작전 계획을 보고받고,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나동원 계엄사 참모장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했다. 같은 날 전두환은 정호용을 통해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공수부대의 기를 죽이지 마시오. 희생이 따르더라도 광주사태를 조기에 수습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의 친필 메모를 전달하며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이에 소준열이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게 '상무충정계획'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5월 25일, 이희성은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 작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여 육본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이 작성되었다. 같은 날 오후, 전두환, 주영복, 이희성, 황영시, 노태우, 류병현 등이 참석한 가운데 5월 27일 0시 이후 작전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작전 실행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47개 대대 2만 317명의 병력을 5개 방면을 통해 광주 시내로 일제히 진입시켰다. 각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남도청 등 주요 목표 지점을 점령하도록 계획되었다.
- 3공수여단 특공조(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및 부사관·병 66명)는 오전 4시경 전남도청에 도착, 후문을 넘어 최후 항전 중이던 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후 오전 5시 21분경 도청을 점령했다.
- 7공수여단 특공조(33대대 8·9지역대 6개 중대, 장교 20명 및 부사관·병 181명)는 오전 5시 6분 광주공원을 점령했다.
- 11공수여단 특공조(61대대 4중대, 장교 4명 및 부사관·병 33명)는 오전 4시 46분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저항 없이 점령한 후, 오전 6시 20분 YWCA 건물을 총격전 끝에 점령했다.
희생 규모
계엄군은 첫 발표에서 시민 2명, 군인 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이후 도청 13명, 광주공원 2명, YWCA 2명 등 시민 17명 사망으로 정정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작전 중 사망한 무장 시위대는 18명으로 밝혀졌으며, 오인사격, 교전 중 유탄, 수하 불응 도주 사격 등으로 사망한 비무장 시민 9명과 실종자도 추가로 확인되었다. 2001년에는 신원불상자로 분류되었던 고등학생의 신원이 밝혀지는 등 공식 희생자는 28명으로 집계되었다. 다만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실종자 의혹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어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가능성도 있다.
의의
광주 재진입 작전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단계에서 신군부가 무력으로 시민 항쟁을 진압한 결정적 군사 작전으로, 이후 전두환 정권의 집권 기반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