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고구려 제19대 군주인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이 414년(장수왕 3)에 건립한 석비이다.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태왕촌(太王村) 대비가(大碑街)에 위치해 있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로도 불리며, 한국에서는 광개토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왕비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된다.
비석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 재질의 자연석을 사각 기둥 형태로 다듬어 세운 사면비(四面碑)이다. 높이는 약 6.39m에 달하며, 하부에는 화강암 기단이 설치되어 있다. 비의 네 면에 총 44행, 약 1,775자의 글자가 예서(隸書)로 음각되어 있으나, 자연 풍화와 후대의 인위적 손상으로 인해 현재 약 140~150여 자는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부분(1면 1~6행)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鄒牟王, 주몽)의 건국 설화와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을 거쳐 광개토왕에 이르는 왕실 계보, 그리고 비의 건립 경위를 서술하고 있다. 둘째 부분(1면 7행~3면 8행)은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으로, 영락(永樂) 연호를 사용한 8개의 기년기사(紀年記事)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패려(稗麗) 정벌(395년), 백제 공격(396년), 숙신(肅愼) 정벌(398년), 신라 구원 원정(400년), 대방계(帶方界)에서의 왜 격퇴(404년), 동부여(東夫餘) 정벌(410년) 등이 포함된다. 셋째 부분(3면 8행~4면 9행)은 광개토왕릉을 수호하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출신지와 가구 수 목록, 수묘제 정비 과정, 수묘인 매매 금지 규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 중에서도 특히 '신묘년조(辛卯年條)'로 불리는 구절(「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은 19세기 말 이후 한·중·일 학계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일본 학계는 초기에 이 구절을 왜(倭)가 391년에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증거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삼았다. 이에 대해 한국 학계에서는 정인보(鄭寅普)가 1955년 문장의 끊어 읽기를 달리하여 바다를 건넌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해석을 제시하였고, 이후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구절을 고구려의 남방 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된 서술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비석은 고구려 멸망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5세기 중반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해(註解)에 그 존재가 처음 언급되었다. 이후 1876~1877년경 청나라가 만주 지역에 회인현(懷仁縣)을 설치하면서 현지 농부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비면은 이끼와 덩굴로 덮여 있었으며,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말똥을 태우는 방식이 사용되어 비면에 균열이 발생하는 손상이 있었다.
비문의 탁본 제작 과정에서 1902년경 현지 탁본업자 초천부(初天富)·초균덕(初均德) 부자가 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선명하게 만든 이른바 '석회 탁본(石灰拓本)'이 제작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 글자가 변형되었다. 1972년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일본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문을 변조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였으나, 1984년 중국 학자 왕젠쥔(王健群)의 현지 조사 결과 석회 도포는 일본 군부와 무관한 현지 탁본업자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현재 비문 연구에서는 석회 도포 이전에 제작된 '원석 탁본(原石拓本)'이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4~5세기 고구려의 정치·사회·군사·제도사는 물론, 한반도와 만주 일대 여러 세력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당대(當代)의 1차 사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2012년에는 동일 지역에서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가 추가로 발견되어 수묘제 등 비문 내용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