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녕(管寧, 158년 ~ 241년)은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에 걸쳐 활동한 은사(隱士)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유안(幼安)이며, 청주 북해국 주허현(朱虛縣) 사람이다. 제나라의 명신이었던 관중(管仲)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한 시대의 연령(燕令)이었던 관소경(管少卿)이 주허에 터를 잡은 이후 대대로 그 지역에 살았다. 관녕은 관소경의 9세손이다.
생애
관녕은 16세 때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어 어려운 환경에서 학문에 힘썼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는 삶을 선택했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해 요동 지방으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서 공손도·공손강·공손공 3대에 걸쳐 벼슬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여러 차례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관녕은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241년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일화
관녕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관녕할석(管寧割席)'이다. 이는 관녕이 조조의 신하였던 화흠(華歆)과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데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어느 날 관녕과 화흠이 함께 밭에서 김을 매다가 땅속에서 금조각을 발견했다. 관녕은 이를 기와 조각 보듯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지만, 화흠은 그것을 주워 던져버렸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방에서 책을 읽는데 길로 고관대작의 행차가 지나가자, 관녕은 변함없이 책을 읽었으나 화흠은 책을 덮고 나가 구경했다. 이에 관녕은 자리를 갈라 앉으며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세설신어》(世說新語)의 〈덕행〉 편에 기록되어 있으며, 친구와의 교제를 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관녕할석'으로 널리 전해진다.
평가와 기록
관녕은 고결한 인품과 깊은 학문으로 당대에 명망이 높았으며, 권력 다툼을 멀리하고 은거하는 삶을 살아 고사(高士)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행적은 《삼국지》 권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도 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화흠·병원(邴原)과 함께 '일룡(一龍)'이라 일컬어지며, 그중 관녕은 용의 머리로 비유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