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갑부 김갑순(公州甲富 金甲淳, 1872~1961)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충청남도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관료이자 기업인, 대지주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순갑(淳甲)이었으나 고종이 갑순(甲淳)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호는 동우(東尤)이며, 일본식 창씨명은 가나이 고슌(金井甲淳)이다.
생애 초기
1872년 5월 22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김현종과 형을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밀양박씨가 국밥 장사와 행상으로 생계를 꾸렸다. 10대 초반부터 공주 감영(監營)에서 관노(官奴)로 잔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이후 우연한 인연으로 충청남도 관찰사의 첩이 된 여성과 의남매를 맺게 되어, 그 연줄로 1899년경 충청남도 감영의 아전(衙前)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관직 경력
1900년 충청북도관찰부 주사(判任官八等)에 임명되었고, 1901년 중추원 의관(奏任官六等)과 내장원(內藏院) 봉세관(捧稅官)을 역임하였다. 1902년 부여군수(扶餘郡守)로 부임한 이후 노성군수(魯城郡守), 임천군수(林川郡守), 공주군수(公州郡守), 김화군수(金化郡守), 아산군수(牙山郡守) 등 충청남도와 강원도 여러 고을의 군수를 두루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직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으며, 합병 후 잠시 아산군수를 지내다가 1911년 사직하였다.
재산 형성
김갑순은 봉세관과 군수로 재직하면서 세금 횡령, 땅 투기 등을 통해 거액의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황무지 개간, 택지 매립, 수리 사업, 자동차 운수업, 극장 사업 등에 진출하였다. 특히 대전 지역이 발전할 것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대전역 주변과 대전 시내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하였다.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할 때 그의 소유지에 도청사가 들어서면서 지가가 폭등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930년대 말 기준으로 그가 공주, 논산, 대전 지역에 소유한 토지는 약 3,371정보(약 1,011만 평)에 달했으며, 당시 대전 시내 전체 토지의 약 40%가 그의 소유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 활동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에 임명되었고, 충청남도 도평의회 의원, 공주읍 읍회의원, 우성수리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유성온천을 주식회사로 개발하여 대전온천주식회사(후에 유성온천주식회사로 개칭)의 전무와 사장을 지냈다. 1938년에는 조선신문사를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친일 전쟁 협력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광복 이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반민특위 해체와 고령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했으나 과거 자신의 마름(소작 관리인) 아들이 인민군 장교로 있어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만년에는 농지개혁(1949년)과 화폐개혁(1953년), 자손 간 재산 분쟁 등으로 상당 부분 재산을 잃었으나, 사망 당시에도 약 3,371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1961년 6월 사망하였으며, 향년 89세였다.
사후 평가
김갑순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82년 MBC에서 《거부실록》 시리즈의 일부로 '공주갑부 김갑순' 편(22부작)이 방영되었으며, 이 드라마에서 그가 자주 사용했다고 알려진 "민나 도로보데스(みんな泥棒です, 모두가 도둑놈들)"라는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