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교회(孔子敎會) 또는 공자교(孔子敎)는 1909년 대한제국 시기에 결성된 유교 계열의 단체이다. 대동학회의 후신으로 출범하였으며, 유교의 근대적 개혁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지원을 받은 친일 성향의 어용단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경과 성립
1898년 청나라의 캉유웨이(康有爲)는 무술변법을 주도하며 유교를 국교화하려 하였고, 기독교의 교회조직을 본받아 1907년 공교회(孔敎會)를 조직하였다. 한국에서의 유교개혁 운동은 1909년 9월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이 조직한 대동교(大同敎)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대동교가 반일 성향을 띠고 친일성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친일 세력은 대동학회를 공자교회로 재편하였다. 대동교의 이용직(李容稙)을 영입해 회장으로 추대하였고, 1909년 10월 9일 유림 68인이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어 창립되었다.
성격과 활동
단체의 공식 목표는 "유도의 진흥과 인도를 밝힌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유교의 친일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25만 원의 자금을 지원하였고, 신문 발간 경비는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이 보조하기로 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유교 경전의 번역 추진,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조문 대표 파견, 《대한매일신문》 매입 등이 있었다. 참가 인물로는 정만조(鄭萬朝)·정병조(鄭丙朝) 형제, 전우(田愚), 여규형(呂圭亨), 김학진(金鶴鎭), 윤덕영(尹德榮), 이인직(李人稙) 등이 있다.
공자교 운동의 전개
한편, 1914년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캉유웨이를 만나 공교운동의 이념을 전수받은 이병헌(李炳憲)은 1919년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을 저술하여 공자교 이념을 체계화하였고, 1923년 중국 공교회의 지부로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에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세웠다. 또한 이승희(李承熙)는 해외 망명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李相卨)을 만나 유교개혁운동에 관심을 갖고, 중국 동삼성에 한인공교회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쇠퇴
공자교는 혁신적인 유교 지식층 일부의 동조를 받았으나, 절대다수인 보수적 유림의 반대와 유교를 사회교화기관으로 축소시키려는 일제 총독부의 종교정책에 부딪혀 유림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1930년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