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덕(孔有德, ?~1652)은 명(明) 말기에서 청(淸) 초기에 활동한 중국의 군인이다. 요동(遼東) 출신으로, 명나라 동강진총병(東江鎭總兵) 모문룡(毛文龍)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후금(後金)과 청에 투항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공유덕은 본래 광부와 해적에 종사한 이력이 있었으며, 모문룡의 부하가 되어 그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다. 1629년 모문룡이 원숭환(袁崇煥)에게 처형된 이후에는 동료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산동순무(山東巡撫) 손원화(孫元化)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이 시기 등주(登州)에서 마카오로부터 들여온 홍이포(紅夷炮)를 다루는 일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1631년, 후금이 대릉하(大凌河)를 포위하자 손원화는 공유덕에게 명 장수 조대수(祖大壽)를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공유덕은 참전 대신 인근 농촌을 약탈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오교병변(吳橋兵變)이라 한다. 이후 공유덕은 경중명과 함께 등주를 함락하고 서양 대포를 획득하였다. 1633년에는 약 1만 4천 명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요동에 상륙하여 후금에 투항하였으며, 홍타이지(皇太極)에게 등주의 대포를 바쳤다.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꾼 이후, 공유덕은 청군의 여러 원정에 참가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명의 멸망을 재촉하는 데 기여하고 남명(南明) 정벌에도 참여하였다.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尙可喜) 세 사람은 '산동의 세 광부(山東三礦徒)'로 불리기도 하였다.
1652년, 공유덕은 광서(廣西)에서 남명 장수 이정국(李定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계림(桂林)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순치제는 그에게 '무장(武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딸 공사정(孔四貞)은 효장황후(孝莊皇后)의 수양딸이 되었으며, 손연령(孫延齡)과 결혼하여 삼번의 난(三藩之亂)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공유덕은 공자(孔子)의 후예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조작된 것으로 보이며 산동 공자의 후손들이 이를 부정한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