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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 (전한)

공수(龔遂, ? ~ 기원전 62년경)는 중국 전한(前漢) 후기의 관료이다. 자는 소경(少卿)이며, 산양군 남평양현(南平陽縣) 출신이다.

생애

공수는 경서(經書)에 밝아 벼슬길에 올랐으며, 창읍나라(昌邑國)의 낭중령(郎中令)이 되어 창읍왕 유하(劉賀)를 섬겼다. 유하가 품행이 바르지 못하자 공수는 그에게 간언하고 부(傅)와 상(相)을 책망하였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에 소제(昭帝)가 붕어하고 유하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유하는 즉위한 지 27일 만에 방탕한 행실로 인해 폐위되었고, 창읍나라에서 온 신하들은 천자를 나쁜 길로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200여 명이 모두 주살되었다. 이때 오직 공수와 창읍중위 왕길(王吉)만이 이전에 간언한 일이 인정되어 목숨을 건지고 성단(城旦)에 처해지는 형벌을 받았다.

발해태수 시절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 발해(勃海) 일대에 도적이 창궐하자 승상과 어사대부가 공수를 추천하여 발해태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수는 나이가 70여 세였다. 선제는 공수가 키가 작아 보잘것없다고 여겼으나, 공수는 도적을 잡는 것보다 백성을 평안하게 다스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며 법으로 구속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선제는 이를 허락하고 황금을 내려주었다.

공수는 발해에 도착하여 병력 접견을 모두 돌려보내고, 농기구와 밭을 가진 자는 모두 양민(良民)으로 규정하는 칙서를 내렸다. 이에 도적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농기구를 집었으며,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공수는 곳간을 열어 빈민을 구휼하고 어진 관리와 목축을 장려하여 지방 행정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수형도위 시절

몇 년 뒤 선제가 공수를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의조(議曹)의 아전 왕생(王生)이 그를 따라 장안에 갔는데, 왕생은 공수에게 "폐하께서 발해를 어떻게 다스렸느냐고 물으시면, '모두 폐하의 덕이지 신의 공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라고 조언하였다. 공수가 이 말대로 하자 선제는 크게 기뻐했으며, 공수가 이미 늙어 공경(公卿)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 수형도위(水衡都尉)에 임명하였다. 왕생은 수형승(水衡丞)에 임명되었다. 공수는 벼슬하던 중 천수를 다하여 사망하였다.

평가

공수는 《한서》의 '순리전(循吏傳)'에 실린 인물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교화를 중시한 유능한 지방관으로 평가된다. 발해태수 시절의 통치 방식은 억압보다 교화와 자율적 안정을 우선시하는 방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출전

  • 반고, 《한서》 권19하 백관공경표 下, 권89 순리전
  • 사마천, 《사기》 골계열전 (공수와 왕생의 일화가 유사하게 수록되어 있으나, 저소손이 보충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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