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황후(高皇后)는 중국 전한(前漢) 초대 황제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황후이자 전한 혜제(惠帝)의 어머니이다. 휘(諱)는 치(雉)이며, 자는 아후(娥姁)이다. 기원전 241년에 태어나 기원전 180년에 사망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정식 황후이자, 최초의 황태후 및 태황태후로 기록된 인물이다. 여후(呂后), 여태후(呂太后) 등으로도 불린다.
생애
현 산둥성(山東省) 지역인 단부(單父)의 유력자 여공(呂公)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패현(沛縣)의 사수(泗水) 정장이던 유방에게 시집가 1남 1녀(혜제 유영, 노원공주)를 두었다. 진(秦) 말기의 혼란기에 초한전(楚漢戰爭)이 발발한 직후, 팽성(彭城)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패퇴했을 때 시아버지 유태공과 함께 초(楚) 진영에 인질로 잡혀 있던 기간이 있었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漢) 왕조를 개창하면서 황후에 책봉되었다. 이후 유방이 원정으로 부재한 동안, 반란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한신(韓信)을 제거하고 황태자 유영의 지위를 안정화하는 데 진력하였다.
황태후·태황태후 시절
고조 사후 혜제 유영이 즉위하면서 황태후로 후견을 맡았으나,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하고 그 어머니 척부인(戚夫人)을 심하게 형벌한 일 등으로 혜제가 충격을 받아 정무를 방치하다가 일찍 죽었다. 이후 여치는 혜제의 아들을 옹립하고 태황태후가 되어 섭정하였다.
이 시기 여치는 유씨(劉氏) 제후왕들을 겁박·제거하고 여씨 일족을 제후왕으로 세우는 등 친정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조의 여러 서자들이 희생되었고, 전소제(前少帝)와 후소제(後少帝)를 차례로 세워 실질적인 통치를 수행하였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이 시기를 '고후기년(高后紀年)'으로 기록하여 그녀의 섭정 기간을 별도의 연대 체계로 다루었다.
사후
여치 사후, 진평(陳平)·주발(周勃)을 위시한 공신들이 황족 유씨 일가와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여씨 일족을 숙청하고 고조의 5남 대왕 유항(代王 劉恒)을 전한 문제(文帝)로 옹립하였다.
당초 여치의 시호는 남편 고조의 시호에서 따온 '고황후(高皇后)'였으나,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그녀의 황후 지위와 시호를 박탈하고 문제의 생모 박씨(薄氏)에게 '고황후' 시호를 추증하였다. 그로 인해 후대에는 '고후(高后)'로도 불린다.
평가
여치의 통치 시기는 황족과 공신들에 대한 숙청이 잦아 정계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계속되었지만, 대외 원정을 극력 자제하고 국민 생활 안정에 힘쓴 결과 시정은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후에 문제·경제(文帝·景帝) 시기의 문경의 치(文景之治)와 무제(武帝) 시대의 대사업의 정치·경제적 기초가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편 그녀는 당(唐)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청(淸)의 서태후(西太后)와 함께 '중국 삼대 악녀'로 일컬어지기도 하나, 이는 전통 사서의 서술 관점에 따른 평가로 현대 역사학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