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평릉 사변(高平陵事變) 또는 고평릉의 변(高平陵之變)은 서기 249년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에서 태부(太傅)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국정을 주도하고 있던 대장군 조상(曹爽)과 그 일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당시 황제 조방(曹芳)의 연호인 정시(正始, 240~249년)를 따서 정시의 변(正始之變)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위(曹魏)의 실권은 조씨 황족 중심에서 사마씨 가문 중심으로 이전되었으며, 이후 서진(西晉)이 건국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배경
서기 238년경 위나라의 황제 조예(曹叡)가 중병에 걸려 후사가 없자 극비리에 입궐시켜 둔 조방을 후사로 삼았고, 조상과 사마의 등에게 뒤를 부탁했다. 조예가 239년에 사망한 후 조방이 즉위하고, 조진(曹眞)의 아들인 조상이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국정을 장악했다. 조상은 하안(何晏), 등양(鄧颺), 이승(李勝), 정밀(丁謐), 필궤(畢軌), 환범(桓範) 등의 측근들을 등용하여 조정을 좌지우지했으며, 동생 조희(曹羲), 조훈(曹訓), 조언(曹彦) 등에게 병권을 나누어 주어 세력을 확대했다.
조상은 하안의 건의로 사마의를 실권이 없는 태부(太傅)의 자리로 격상시켜 병권에서 배제하려 했다. 이에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가장하여 조상의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전략을 취했다.
사건의 과정
249년 조상이 황제 조방과 함께 세 아우와 심복 하안, 어림군 등을 거느리고 선제 조예의 능인 고평릉(高平陵)에 참배하러 간 틈을 타,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와 함께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성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사마의는 사도(司徒) 고유(高柔)에게 대장군직을 대행하게 하여 조상의 진영을 장악하고, 태복(太僕) 왕관(王觀)에게 중령군직을 대행하게 하여 조희의 진영을 점거했다. 또한 곽태후의 명의로 조상 일파의 군권을 박탈하는 표문을 작성하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상은 환범 등이 군사를 일으켜 사마의를 토벌하자는 강경론을 주장했지만, 사마의가 보낸 허윤(許允), 진태(陳泰) 등이 병권만 반납하면 목숨과 작위를 보전해 주겠다는 뜻을 전하자, 결국 병권을 반납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조상이 인수(印綬)를 넘기자 그의 군사들은 흩어졌다.
결과
사마의는 환관 장당(張當)을 고문하여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낸 뒤, 조상과 그의 세 형제, 그리고 하안·등양·이승·정밀·필궤·환범 등 측근 일파를 모두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조상 계열의 정치 세력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오로지 조상의 종제(從弟) 문숙(文淑)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고 한다.
이후 사마의는 승상(丞相)에 봉해지고 구석(九錫)의 예우를 받으며 위나라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사건은 조위의 멸망을 앞당기고 사마씨가 서진을 건국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삼국시대 후반부의 정치적 변곡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