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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양위 사건

고종 양위 사건은 1907년 7월 19일,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제위를 황태자(훗날 순종)에게 넘겨준 사건이다.

배경

고종은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으로 외교권과 통치권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빼앗긴 상황에서도 국권 회복을 모색하였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을 특사로 비밀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헤이그 밀사 사건'(헤이그 특사 사건)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일본 측에 알려지면서 일본은 이를 고종의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이자 보호조약 위반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책임을 추궁하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직접 책임을 물으며 위협을 가했다.

전개 과정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총리대신 이완용 내각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돌리고, 고종에게 양위를 압박하였다. 어전회의 과정에서 송병준 등은 고종에게 자결을 요구하거나 도쿄로 가서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등 극단적인 협박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처음에는 순종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결국 이를 수용하였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은 황제 대리 의식을 거쳐 제위를 황태자에게 넘겨주었고, 황태자는 순종으로 즉위하였다.

결과 및 영향

이 사건 직후인 7월 24일에는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내정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다. 고종은 '태황제'로 불리며 덕수궁에 머물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분노는 고종 양위를 주도한 이완용 등에게 집중되었다. 당시 이완용의 집이 군중에 의해 불태워지고, 반대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1909년에는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고종 양위 사건은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된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이후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자리한다.

참고 자료

이 문서는 위키백과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수록된 공신력 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사건의 구체적 경과에 관한 일부 세부 묘사(예: 어전회의에서의 발언 등)는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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