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후(高因厚, 1561~1592)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이다.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가계
고인후는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이고, 아버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고경명(高敬命)이다.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인 울산김씨이다. 형은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이다. 부인은 이경(李璥)의 딸인 함평이씨이며, 4남 1녀를 두었다.
생애와 활동
고인후는 1579년(선조 12) 진사에 입격하였고,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권지학유(權知學諭)에 보임된 뒤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광주 고향에 머물고 있던 고인후는 아버지 고경명의 명에 따라 흩어진 관군을 모아 형 고종후와 함께 수원에 유진하고 있던 정윤우(丁允祐)에게 인계하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북상 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
의병 부대가 여산에 이르렀을 때 황간·영동 지역의 왜적이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계획을 변경, 금산으로 향하였다. 금산에서는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왜적이 침입하자 관군이 먼저 붕괴되고 의병도 함께 무너져, 고인후는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는 제2차 금산전투로 알려진 전투이다.
사후 추증과 제향
고인후는 사후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후 1629년(인조 7) 아들 고부천(高傅川)의 종훈(從勳)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94년(숙종 20)에는 의열(毅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시신 수습
형 고종후는 고인후와 아버지 고경명의 시신을 승군(僧軍)에게 부탁하여 수습하였으며, 사망 40여 일이 지났음에도 안색이 산 사람과 같았다고 전한다. 시신은 전라도 광주 창평 수곡리에 안장되었다.
가족
아들로는 고부림(高傅霖), 고부천(高傅川), 고부집(高傅楫), 고부량(高傅良)이 있으며, 이 중 고부천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딸은 오희일(吳希一)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인후' 항목
- 위키백과, '고인후'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