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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피치 전투

고스피치 전투(세르비아어: Битка за Госпић, 크로아티아어: Bitka za Gospić)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인 1991년 8월 29일부터 9월 22일까지 크로아티아의 고스피치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준군사조직인 세르비아 방위군이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 고스피치 주둔 경찰, 그리고 크로아티아 내 다른 지역에서 증원된 경찰 부대와 충돌한 사건으로,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배경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브계가 주로 거주하는 크닌을 중심으로 한 달마티아 내륙 지역과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등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이 지역은 세르브인 자치주(SAO 크라이나)로 선포되었으며,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반란 행위로 규정했다. 1991년 3월 분쟁이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1991년 6월 유고슬라비아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SAO 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면서 크로아티아는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창설했다.

전투 경과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은 1991년 8월 29일 디보셀로 마을과 야시코바츠 막사에 주둔한 포병을 이용해 고스피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포격의 강도는 9월 중순으로 갈수록 크게 증가해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SAO 크라이나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도시 내 구조물의 50%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전투 초반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은 크로아티아군을 고스피치 동부에서 밀어냈으나, 9월 14일 크로아티아군이 유고 인민군의 보급고를 점령하여 소총 14,000정과 상당량의 대전차 무기를 확보하면서 전세가 크로아티아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3일간의 전투 끝에 스탄코옵세니차 막사가 함락되면서 고스피치 주둔 유고 인민군의 대부분은 9월 18일 항복했다. 크로아티아군은 이후 야시코바츠 막사도 점령했으며, 9월 22일까지 고스피치 지역의 잔당 격퇴를 마쳤다.

결과 및 여파

크로아티아군은 유고 인민군 장교와 병사 약 3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들은 이후 부코바르 전투 등 다른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이 붙잡은 크로아티아군 포로와 교환되었다. 전차 7대와 120mm 박격포 12문도 노획했다. 그러나 전투 종료 이후에도 고스피치 남쪽 포 진지에서 도시를 향한 포격이 계속 이어졌으며, 1991년 11월 1일에는 하루 3,500발의 포탄이 마을을 강타하기도 했다. 리카 지역의 교전은 1992년 1월 2일 사라예보 협정 체결로 휴전이 선언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전투 이후 고스피치 지역에서는 인종 간 폭력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약 100여 명의 세르브인 민간인이 마을에서 끌려나와 학살당한 이른바 고스피치 학살과, 크로아트인 민간인 40명이 희생된 시로카쿨라 학살 등 전쟁 범죄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크로아티아 사법부와 세르비아 법원, 그리고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차원에서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와 재판이 진행되었다.

교전 세력 및 병력

유고 인민군 측은 장교 70명과 병사 4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고스피치의 5개 군사시설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르비아 방위군 준군사조직 약 128명의 지원을 받았다. 크로아티아군 측은 427명으로, 대부분 고스피치, 리예카, 자보크 등지의 경찰과 소수의 자원군,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으로 구성되었다. 고스피치의 유고 인민군 주둔군은 공식적으로 페타르 차바르 대령이 지휘했으나, 실질적인 지휘권은 유고슬라비아 방첩국 소속 렐랴 토미치 소령이 쥐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측은 미르코 노라츠 중령이 제118보병여단을 지휘했다.

이 전투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초기 크로아티아군이 유고 인민군의 정규 막사를 함락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크로아티아 측의 저항 능력을 보여준 전투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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