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대신(顧命大臣)은 고명지신(顧命之臣)이라고도 불리며, 황제나 국왕이 퇴임하거나 임종할 때 남긴 마지막 당부 및 유언을 받드는 대신을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이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으로, 한국과 동아시아의 전근대 왕조사에서 확인되는 제도적·관습적 용어이다.
정의와 역할
고명대신은 임금의 유언인 '고명(顧命)'을 받아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은 신하를 의미한다. 고명을 받은 대상에는 정승, 판서, 참판 또는 그 직을 역임한 시임·원임 대신들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을 보좌하는 승지, 대간, 낭관도 고명대신의 범주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고명대신은 차기 임금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존재였기 때문에, 선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신하 중에서도 특히 신임이 두터운 인물들이 선정되었다. 이 시기의 인물을 섭정승(攝政丞)이라고도 부른다.
고명의 내용과 형식
고명(顧命)은 왕이 임종 시에 왕자나 대신들에게 최후로 남긴 말로, '유명(遺命)', '유훈(遺訓)', '유조(遺詔)', '유고(遺誥)', '유교(遺敎)'라고도 하였다. 고명의 내용은 보통 후계 문제, 장례 절차, 선정 당부(善政當付) 등이었다. 고명은 구두로 전하기도 하였고, 유조나 유교와 같은 문서의 형태로 남기기도 하였다.
기원과 역사적 사례
고명대신의 기원은 중국 주나라의 성왕(成王)이 임종 시에 군신들을 불러 강왕(康王)의 보호와 선정의 시행을 당부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의 동명왕이 기원전 19년에 유리왕에게 "도(道)로써 다스림을 일으키라"는 고명을 남긴 사실이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는 유리이사금, 문무왕, 선덕왕, 문성왕, 헌안왕의 고명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특히 문무왕의 유조는 자신의 치적에 대한 평가, 죽음에 대한 달관, 태자에게 준 당부, 장례의 간소화, 부세의 경감, 율령의 개정 문제 등을 자세히 담은 명문으로, 격식을 갖춘 고명의 전형적인 예로 평가된다.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몽골 침입 이전까지 대부분의 왕들이 장문의 유조를 남겼으며, 이는 형식화된 하나의 관례로 간주된다. 조선시대에는 왕들이 고명을 남기는 일이 드물었으며, 세조, 인종, 영조, 정조만이 후계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것으로 전한다. 세종은 만년에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후사를 부탁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고명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정치적 영향력
고명대신은 선왕의 생전에 두터운 신임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후대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국 청나라의 순치제 말기와 강희제 초기에는 혁사리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 등 4대 고명대신이 존재한 사례가 있다. 조선에서는 문종 사후 단종을 보좌하던 고명대신 세력과 수양대군(세조) 사이의 갈등이 계유정난으로 이어진 역사적 사건이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 『고려사』
- 『세조실록』
- 『인종실록』
- 『서경(書經)』
- 광개토대왕릉비문
- 신병주, 『조선평전』, 글항아리, 2011
- 신동준, 『왕의 남자들』, 브리즈,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