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고려의 여진 정벌(女眞征伐)은 고려군이 천리장성 이북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을 토벌한 일련의 전쟁을 가리킨다. 여진 정벌은 1차 정벌(1104년)과 2차 정벌(1107~1109년)로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고려는 동북 9성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를 반환하게 된다. 이 전쟁은 고려의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배경
만주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여진족 일부가 고려의 천리장성 인근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고려는 건국 이래 동북면의 여진 부족을 번(蕃)으로 삼아 영향권 아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여진의 완안부(完顔部)가 세력을 확장하여 그간 고려의 영향권 안에 있던 여진 부족들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고려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여진 정벌을 시행하였다.
경과
제1차 여진 정벌 (1104년)
숙종 9년(1104년), 완안부의 군대가 국경 지역인 정주(定州) 관문 밖까지 내려와 기병을 주둔시켰다. 고려는 임간(林幹)을 파견하여 대응하였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어 윤관(尹瓘)을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윤관은 패전의 원인을 기병 중심의 여진군과 보병 중심의 고려군의 차이에서 찾고,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의 창설을 건의하였다.
제2차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설치 (1107~1109년)
예종 2년(1107년) 10월, 예종은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여진 정벌을 재개하였다. 출정군은 총 17만 명 규모였으며 별무반도 참여하였다. 고려군은 여진의 135개 촌을 격파하고 약 5,000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윤관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 등의 동북 9성을 축조하고, 남쪽 지역의 백성 약 75,000여 호를 이주시켜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결과 및 반환
그러나 빼앗긴 생활 터전을 되찾고자 하는 여진의 저항은 치열하였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군의 공격이 지속되었고, 9성 간 거리가 멀고 지세가 험준하여 관리가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또한 계속되는 전쟁으로 물자 조달, 기근, 전염병 등 국내적 어려움이 겹쳤다. 1109년(예종 4년), 여진이 9성 반환 시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겠다고 화친을 청하자, 고려 조정은 반환론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고려는 동북 9성에서 철수하고 개척한 영토를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동북 9성 설치 후 반환까지는 약 2년여에 불과하였다.
이후 윤관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으며 공신호까지 박탈당하였다. 여진의 완안부는 세력을 더욱 키워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였고, 이후 고려는 금에 대하여 군신 관계를 취하게 되었다.
역사적 의의
고려의 여진 정벌은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남기고 실패로 끝났으며, 고려 건국 이래 추진되던 북진 정책도 좌절되었다. 다만 이 경험은 이후 고려 말·조선 초기의 북방 영토 개척에서 옛 영토 회복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참고 사항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란이 있으며, 공험진의 위치 규명을 중심으로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크다. 관련 기록이 단편적이고 상호 모순되는 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