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코린토스(Ancient Corinth, 그리스어: Αρχαία Κόρινθος)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 국가(폴리스) 중 하나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코린토스 지협(Isthmus of Corinth)에 위치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략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오늘날의 코린토스 시는 고대 유적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지리적 위치
코린토스는 동쪽으로 에게해의 사로니코스 만(Saronic Gulf), 서쪽으로 이오니아해의 코린토스 만(Corinthian Gulf)에 접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서쪽의 주요 항구는 레카이온(Lechaion), 동쪽의 주요 항구는 켄크레아이(Kenchreai)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고대 코린토스는 동서 해상 무역과 남북 육상 교통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역사
선사 시대 및 건국 신화
신석기 시대 토기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6500년경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00년경 미케네 문명 시기에는 궁전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도 코린토스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Pausanias, 2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코린토스는 제우스의 후손인 코린토스(Corinthos)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티탄 오케아노스의 딸인 여신 에피라(Ephyra)가 도시를 세웠으며, 이에 따라 고대에는 도시를 '에피라'라고도 불렀다.
바키아다이 가문의 지배 (기원전 8~7세기)
기원전 8세기까지 코린토스는 도리스 계통의 바키아다이(Bacchiadae) 가문이 통치하는 과두정 체제였다. 이 시기 코린토스는 기원전 733년경 시라쿠사(Syracuse)와 코르키라(Corcyra, 오늘날의 코르푸) 등 서부 지중해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참주 시대 (기원전 657~기원전 550년경)
기원전 657년, 키프셀로스(Cypselus)가 바키아다이 귀족을 축출하고 참주(tyrant)로 집권하였다. 그의 아들 페리안드로스(Periander, 재위 기원전 627~기원전 587년)는 고대 그리스의 일곱 현인(Sage)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코린토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페리안드로스는 최초로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기술적 어려움으로 실패하고, 대신 배를 육지로 끌어 옮기는 돌길인 디올코스(Diolkos)를 건설하였다. 또한 최초의 코린토스 주화를 주조하였다.
고전기
고전 시기에 코린토스는 아테네, 테바이와 함께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6세기 중반에는 도리아 양식의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이 건립되었다. 코린토스는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0~기원전 479년)에 참전하여 테르모필레 전투에 400명의 병사를 파견하고, 살라미스 해전에 40척의 전함을 제공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기원전 404년)에서는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와 대립하였다. 전쟁 이후 기원전 395년부터 기원전 387년까지 이어진 코린토스 전쟁(Corinthian War)에서는 테바이, 아테네, 아르고스와 연합하여 스파르타에 맞섰다.
마케도니아와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코린토스 동맹(League of Corinth)을 결성하였고, 코린토스는 마케도니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아카이아 동맹(Achaean League)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로마의 파괴와 재건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정의 루키우스 뭄미우스(Lucius Mummi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코린토스를 점령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약 100년 후인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코린토스를 로마 식민지 '콜로니아 라우스 율리아 코린티엔시스'(Colonia Laus Iulia Corinthiensis)로 재건하였다. 이후 로마 속주 아카이아(Achaea)의 수도가 되었다.
신약 성서와 사도 바울
사도 바울(Paul the Apostle)은 서기 49~50년경 코린토스에 도착하여 약 18개월간 체류하며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바울이 이 교회에 보낸 편지가 신약 성서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한글 성서 표기: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이다. 사도행전 18장에는 바울이 코린토스에서 총독 갈리오 앞에서 재판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비잔틴 시기 이후
비잔틴 제국 시기에도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었으나, 1147년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에게 약탈당한 이후 쇠퇴하였다. 1205년 제4차 십자군 이후 프랑크족의 지배를 거쳐, 1458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1687년부터 1715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스 독립 전쟁(1821~1830) 이후 1832년 그리스 왕국에 편입되었다.
주요 유적
아폴론 신전 (Temple of Apollo)
기원전 6세기 중반(약 기원전 550년경)에 건립된 도리아 양식의 신전이다. 원래 3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7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각 기둥은 높이 약 7m, 하단 직경 약 1.7m로 단일 석재로 제작되었다.
아크로코린토스 (Acrocorinth)
해발 575m의 단일 암반으로 이루어진 고대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성채)이다. '펠로폰네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난공불락의 요새로, 고대부터 19세기 초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으며, 이후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 사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아고라 (Agora)
도시의 중앙 광장으로, 로마 시대에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중앙에는 '베마'(Bema)라고 불리는 연단이 있으며,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재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레카이온 도로 (Lechaion Road)
아고라에서 레카이온 항구까지 이어지는 포장 도로로, 양쪽에 상점과 공공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정교한 배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극장 (Theatre)
기원전 5세기경 처음 건립되었으며, 약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로마 시대에 증축되어 검투 경기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오데이온 (Odeion)
서기 1세기에 건립된 실내 공연장으로, 약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음악과 웅변 대회 등이 열렸다.
문화와 경제
무역과 경제
코린토스는 지협을 통제함으로써 막대한 무역 수익을 올렸다. 기원전 7~6세기에는 흑회식 도기(black-figure pottery)의 주요 생산지이자 수출국이었으나, 이후 아테네 도기에게 시장을 빼앗겼다. 기원전 5세기경에는 삼단노선(trireme)을 개발하여 해군력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스트미아 제전 (Isthmian Games)
코린토스는 고대 그리스 4대 범그리스 제전 중 하나인 이스트미아 제전을 주관하였다. 기원전 582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올림피아 제전의 2년째와 4년째에 개최되었다. 포세이돈 신을 기리는 제전이었다.
코린토스 양식 (Corinthian Order)
고대 그리스 건축의 세 가지 주요 양식(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토스식) 중 가장 복잡하고 장식적인 코린토스 양식이 이 도시에서 발전하였다. 전통에 따르면 조각가 칼리마코스(Callimachus)가 이 양식을 발명하였다고 비트루비우스가 기록하였다.
아프로디테 신전과 신전 창녀
아크로코린토스 정상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다.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은 이 신전에 천 명이 넘는 신전 창녀(헤타이라)가 고용되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정확성과 '신전 매춘(sacred prostitution)'의 실제 규모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고고학 발굴
1896년부터 아테네 미국 고전학파(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가 체계적인 발굴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발굴을 통해 신석기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층위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발굴된 유물은 고대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of Ancient Corinth)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