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옥저의 관계는 고구려의 일방적인 지배와 옥저의 종속으로 특징지어진다. 옥저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계(扶餘系) 예맥족(濊貊族)의 한 갈래였으나,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여러 읍락(邑落)으로 분산된 군장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세력이 팽창함에 따라 동쪽의 옥저 지역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동옥저(東沃沮)는 서기 56년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에 의하여 정복되었으며, 이에 대한 학계의 이견은 거의 없다. 북옥저(北沃沮)의 경우, 일부 기록에 따르면 동명성왕 28년(기원전 28년)에 이미 멸망했다고도 하나, 244년 관구검(毌丘儉)의 침략 당시 고구려 동천왕이 북옥저로 피난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후까지도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옥저를 간접 지배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각 읍락의 족장을 고구려의 '사자(使者)'로 임명하여 그를 통해 공납을 징수하게 하였고, 고구려인 '대가(大加)'가 공납 징수 문제를 총괄하였다. 옥저가 고구려에 바친 공물로는 맥포(貊布), 생선, 소금 및 기타 해산물이 주를 이루었으며, 미녀도 공물로 보내져 고구려인의 첩이 되었는데 이들은 노예처럼 대우받았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국가 구조에서 옥저의 각 읍락들은 지배 조직의 말단에 위치하여 일종의 '집단예민(集團隷民)'적인 성격을 지녔다.
옥저는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244년 위(魏)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동천왕은 옥저 지역으로 피난하였고, 위군이 옥저의 읍락들을 유린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위군이 격퇴된 이후 고구려의 옥저에 대한 지배는 지속되었다.
한편, 285년 부여(扶餘)가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을 받아 왕실이 북옥저 지역으로 피난해 왔으며, 이후 부여 왕실이 본국을 회복하여 돌아간 뒤에도 일부 세력이 그곳에 남아 동부여(東扶餘)를 형성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이 동부여는 410년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고구려는 이 지역에 책성(柵城)을 설치하여 동부 지역의 중심 거점으로 삼았다.
요약하면, 고구려와 옥저의 관계는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에 기반한 지배-종속 관계였으며, 옥저는 독자적인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고구려의 간접 지배 아래 공납을 제공하는 예속적 위치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