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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

경주읍성(慶州邑城)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북부동과 동부동 일원에 위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평지 읍성(邑城)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성곽을 의미한다. 경주읍성은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96호로 지정되었으며, 국가유산청에 등재된 명칭은 '경주읍성(慶州邑城)'이고 영문 명칭은 'Gyeongjueupseong Walled Town'이다.

초축 시기 및 연혁

경주읍성의 정확한 초축(初築) 시기를 명시한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병지(兵志) 성보(城堡) 조에 1012년(고려 현종 3) 경주·장주·금양·궁올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읍성이 초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경통지』(1933년 간행) 권6 성지 조에는 "읍성의 시축 연대는 불명이나, 고려 우왕 4년(1378)에 개축하였고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 7촌으로 석축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토성(土城)으로 축조되었다가 이후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으며, 이는 발굴 조사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조선 세종 대(1418~1450)에는 전국적으로 읍성 개축이 진행되었는데, 경주읍성도 이 시기에 수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종실록』(1451년)에는 경주읍성의 둘레 4,075척, 높이 11척 6촌, 적대(敵臺) 26개소, 문 3개소, 여장(女牆) 1,155첩, 우물 83개소 등의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성이 파손되었고, 1632년(인조 10) 부윤 전식(全湜)이 동문·서문·북문을 중수하였다. 이후 1744년(영조 20) 부윤 정홍제가 성을 개축하였고, 1755년(영조 31) 부윤 이수득이 남문루를 중건하였으며, 1870년(고종 7) 부윤 조기영이 마지막으로 수리한 기록이 확인된다.

성문의 구성

경주읍성은 동·서·남·북에 각각 문루(門樓)가 있었다. 남문은 징례문(徵禮門)이라고 불리며, 숭례문을 제외하고 전국 읍성 문루 중 가장 컸다고 전한다. 성덕대왕신종(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이 이 문에 걸려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징례문은 '고도남루(故都南樓)'라는 편액도 있었다. 동문은 향일문(向日門), 서문은 망미문(望美門), 북문은 공신문(拱辰門) 또는 공진문이라고 불렸다.

철거와 훼손

일제강점기인 1912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경주를 방문하여 석굴암을 순시할 당시, 자동차로 성 안에 진입할 수 있도록 미리 징례문이 철거되었다. 이후 1915년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신작로(新作路)가 개설되었고, 1918년 대구~불국사역 간 철도 개설에 읍성의 석재가 사용되면서 성벽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1933년 기록에서는 성벽 대부분이 철거되어 잔해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발굴과 복원

1985년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성벽과 내부 건물지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었다. 2009년 경주읍성 복원 계획이 수립되었고, 2012년부터 연차적으로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2018년 11월 8일에는 동문인 향일문과 동쪽 성곽 324m가 복원되었으며, 향일문은 웅성(甕城)까지 함께 복원되었다. 경주시는 총 437억 원을 투입하여 2030년까지 전체 성곽 2.4km 가운데 동·북쪽 성곽 1,025m와 동·북문, 치성 11개소를 복원하고, 성 내에 남아 있던 동경관(東京館) 및 집경전(集慶殿)과 같은 유적을 정비할 계획이다.

의의

경주읍성은 신라 왕경(王京)의 북쪽에 위치하면서 고려시대의 동경(東京), 조선시대 경주부(慶州府)의 행정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중세 경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며, 고려시대 토성에서 조선시대 석성으로의 변화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한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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