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은군(景恩君, 1860년 12월 21일 ~ ?)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왕족이며,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휘(諱)는 재성(載星)이다. 장조(사도세자)의 서장남인 은언군(恩彦君)의 증손이며, 익평군(益平君) 이희(李曦)의 서자이다.
출생과 가계
1860년 12월 21일(음력 11월 10일) 익평군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익평군은 풍계군(豊溪君) 이당(李㻋)의 서자였다가 상계군(常溪君) 이담(李湛)의 양자로 입양된 인물이다. 경은군은 서자였기 때문에 아버지 익평군이 사망한 후, 덕흥대원군파에서 이재덕(李載悳)이 익평군의 사후양자로 입적되어 가문을 이었다. 혈통상으로는 효종의 부계 후손 중 영평군(永平君)과 함께 단 두 명만이 남은 생존 남성 왕손이었으나, 서출이라는 한계와 어린 나이 등으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관직 생활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1879년(고종 16) 승문원 이문학관에 제수되었고, 이후 지방관으로 군수를 역임하였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종실 및 대신들과 함께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건의하였다. 같은 해 독립협회에 찬조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수립 직후에는 이천군수, 원구단 황궁우 역소 별감, 내부 시찰관 등을 지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에는 연초제조주식회사(煙草製造株式會社)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봉작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4대손에 해당하는 종친으로서 경은도정(景恩都正)에 봉작되었고, 1900년(광무 4) 경은군(景恩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같은 시기 경운궁(덕수궁) 담장 확장 공사를 마무리한 공적으로 품계가 종2품으로 올랐다.
말년과 실종
1903년(광무 7)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되어 칙임관 4등에 서임되었고, 다시 경은군에 봉해졌다. 1906년(광무 10) 동구릉 수릉관으로 재직 중 재실 근처에 색주가를 설치한 일로 《대한매일신보》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고종으로부터 훈1등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1907년(융희 1) 10월 14일, 순종이 "경은군 이재성이 남몰래 행동하면서 나쁜 무리와 호응한다"는 이유로 직첩(職牒)을 환수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이는 항일 의병과 내통했다는 혐의에 따른 것이었다. 1910년(융희 4) 3월에는 실종되어 거처를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경시청에서 그 종적을 찾고 있었다는 기록이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며, 사망 연대와 묘소의 위치도 알려져 있지 않다.
가족
초취(初娶)는 안동 권씨(권재익의 딸)로 1888년 사망하였고, 계배(繼配)는 여흥 이씨(이병로의 딸)이다. 경은군의 후손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확인되지 않으며, 《선원속보》에도 자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