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景哀王)은 신라 제5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924년부터 927년까지이다. 성은 박씨(朴氏)이며, 이름은 위응(魏膺)이다. 아버지는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형은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이며, 경애왕은 경명왕의 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애왕이 즉위할 당시 신라는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국력이 크게 쇠퇴한 상태였다.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王建)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견제하는 외교 노선을 취하였다. 925년에는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고려에 투항하기도 하였고, 927년에는 강주(康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는 등 후삼국의 패권은 점차 고려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927년(경애왕 4년), 견훤이 고울부(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를 습격하자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정예병 1만 명을 파견하였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인同年 음력 11월에 견훤이 신라의 왕경(王京)인 금성(경주)을 기습 침공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 종실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다가 견훤의 급습을 당하였다. 경애왕은 후궁에 숨었다가 견훤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자살을 강요당하였고, 왕비는 강간을 당하는 등 신라 왕실은 큰 치욕을 겪었다. 다만 포석정이 단순한 연회장이 아니라 제사 시설(포석사)이었으며, 경애왕이 한겨울(음력 11월)에 제례를 지내던 중 피습당했다는 학계의 견해도 존재한다.
견훤은 경애왕을 죽인 후, 경애왕의 이종사촌 동생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다.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하여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위치한 경주 경애왕릉(사적 제222호)이 경애왕의 능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현재 일성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실제 경애왕릉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편, 경애왕 재위 시절인 924년에 황룡사(黃龍寺)에서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열고 선승(禪僧) 300여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를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하여 대규모 선승(禪僧) 모임의 시초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