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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 대기근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 재위 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기근이다. 명칭은 경술년(庚戌年)의 '경(庚)'과 신해년(辛亥年)의 '신(辛)'을 따서 '경신(庚辛)'이라 부른 것이며, 경신년(庚申年, 1680년)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경술·신해 대기근(庚戌辛亥大飢饉)'이라고도 한다.

발생 원인

경신 대기근의 근본적 원인은 17세기 전 지구적 소빙하기(小氷期) 현상으로 지목된다. 당시 태양 활동 저하로 인해 지구 평균 기온이 하락하였고,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이상 기후와 기근이 빈발하였다. 조선에서는 1670년 봄부터 가뭄, 냉해(冷害), 우박, 홍수, 해충(메뚜기떼), 전염병, 가축 전염병(우역) 등 각종 자연재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농업 생산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경과

1670년(경술년) 음력 1월부터 잦은 햇무리·달무리 관측, 유성 및 운석 낙하, 지진 등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윤2월부터 5월까지 전국적으로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었고, 동시에 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는 오리알 크기의 우박이 쏟아져 인명 피해와 농작물 전멸이 발생했다. 5월 말에 비가 내렸으나 이미 파종 시기를 놓친 뒤였다. 6월부터는 반대로 전국에 폭우와 태풍이 쏟아져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였고, 제주도에서는 해일로 인해 염해(鹽害)가 발생하여 농작물이 전멸하였다. 여기에 메뚜기떼와 참새떼가 곡식을 먹어치웠고, 우역(牛疫)으로 소가 대량 폐사하였다.

1671년(신해년)에도 기근은 지속되었다. 정부는 한성(서울)에 진휼소를 설치하여 구휼에 나섰으나, 전국에서 유민이 몰려들면서 전염병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궁궐 내부까지 전염병이 번져 왕실이 경덕궁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피해 규모

당시 조선 팔도 전역이 흉작을 기록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이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관료 윤경교는 사망자가 100만 명을 상회한다고 보고하였다. 공식 구휼소에서 집계된 사망자는 약 8만 5천 명이었으나, 지방 수령의 축소 보고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사망자는 20만 명에서 85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 1669년 조선의 호적상 인구는 약 516만 명이었으나, 실제 인구는 1,200만~1,4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사회적 영향

기근이 심화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자녀나 부모를 버리는 사건, 식인(食人) 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충청도 연산(현 논산시)에서는 한 여성이 죽은 자녀의 고기를 삶아 먹은 사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청나라로부터의 쌀 수입이 논의되었으나, 외교적 부담과 운송 문제로 인해 실행되지 않았다.

결과 및 영향

경신 대기근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를 가속화한 계기로 평가된다. 대동법(大同法)에 대한 지지 여론이 높아져 이후 경상도 등으로 확대 시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많은 유민이 북방과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국경 문제와 백두산정계비 설치로 이어졌다. 온돌의 전국적 보급으로 인한 산림 자원 고갈도 이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이후 1695년(숙종 21년)에는 을병대기근(乙丙大飢饉)이 다시 발생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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