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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수영

개요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은 조선 시대 경상좌도(慶尙左道, 경상도 동부) 해안 방면의 수군(水軍)을 지휘하던 군영(軍營)이다. 정식 명칭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이며, 지휘관은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맡았다. 별칭으로는 동래부에서 유래한 '래영(萊營)'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최종적으로 동래부(東萊府, 현재 부산광역시) 해운포(海雲浦) 일대에 자리 잡았다. 현재 부산광역시의 자치구인 '수영구(水營區)'라는 지명은 이 경상좌수영에서 유래한 것이다.

연혁

설치와 초기의 이전

조선 시대 행정구역상의 경상좌도·우도 구분은 태종 7년(1407년)에 이루어졌으며, 그 기준은 낙동강이었다. 그러나 군사적 편제는 더 일찍, 태조 2년(1394년)에 박자안과 김을귀를 각각 좌·우도 수군도절제사로 삼아 병선을 거느리고 왜적을 막게 한 기록에서 그 시행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좌수영의 처음 설치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최초의 위치는 동래부 부산포(釜山浦)였으며, 당시 명칭은 경상좌도도안무처치사영(慶尙左道都按撫處置使營)이었다. 세조 4년(1458년)에 부산포가 왜인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 군사 정보가 새어 나갈 우려가 있다는 경상좌도절제사 이호성의 건의로, 이듬해인 세조 5년(1459년) 1월에 병영(兵營)이 있던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이전하였다.

세조 12년(1466년)에는 수군도안무처치사가 수군절도사로 개칭되었다.

잦은 이전 논의와 해운포 정착

울산 한 고을에 병영과 수영이 함께 위치하게 되어 백성들의 부담이 과중하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성종 8년(1477년)과 성종 13년(1482년), 중종 6년(1511년) 등 여러 차례 이전 논의가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중종 39년(1544년) 9월에 경상좌수영을 동래 해운포로 옮기는 것이 확정되었으나, 실제 이전 시기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영은 초기 패전으로 다수의 진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면서 군사적 기능을 상실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수차례 이전 논의가 반복되었다. 해운포 선창은 입구가 좁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역에 위치하여 모래 퇴적으로 선박 출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조 14년(1636년)에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두모포왜관과 인접하여 군사 기밀 유출 우려가 제기되어 효종 3년(1652년) 다시 해운포로 복귀하였다. 이후에도 모래 퇴적 문제가 지속되었으며, 현종 11년(1670년)과 영조 4년(1728년)에 석축 공사 등의 대책이 시행되었다. 경상좌수영은 고종 32년(1895년) 7월 군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마지막 경상좌수사는 이병승(李秉承)이다.

편제

경상좌수영에는 조선 후기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부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 좌수영 본영(本營): 판옥선 3척, 거북선 1척
  • 부산포진(釜山浦鎭): 종3품 수군첨절제사 (판옥선 1척, 거북선 1척)
  • 다대포진(多大浦鎭): 종3품 수군첨절제사 (판옥선 1척, 거북선 1척)
  • 서생포진(西生浦鎭): 종4품 수군동첨절제사 (판옥선 1척)
  • 두모포진(豆毛浦鎭): 종4품 수군만호 (판옥선 1척)
  • 개운포진(開雲浦鎭): 종4품 수군만호 (판옥선 1척)
  • 포이포진(包伊浦鎭): 종4품 수군만호 (판옥선 1척)
  • 서평포진(西平浦鎭): 종4품 수군만호 (판옥선 1척)

경상좌수영은 예하에 7개의 진을 거느렸으며, 전체적으로 약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보조선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시설

경상좌수영 내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건물이 있었다.

  • 운주헌(運籌軒): 경상좌수사의 업무 공간
  • 내아(內衙): 수군절도사 가족의 생활 공간
  • 원문(轅門) 수항루(受降樓): 군영 정문
  • 객사(客舍) 영파당(寧波堂): 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관원의 숙박에 사용되던 건물

좌수영 인근에는 동래도호부(행정·사법·치안 담당 관청), 부산포진( 좌수영 예하 수군첨절제사 군영), 초량왜관(일본인 거주 지역) 등이 위치하여 대일 외교·방어 체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문화재적 의의

경상좌수영이 있던 자리는 현재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과 광안동 일대의 경상좌수영성지(慶尙左水營城址)로 남아 있다. 이 성지는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8호 '좌수영성지'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9월 3일 문화재의 성격을 명확히 표기하기 위해 '경상좌수영성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좌수영성은 석축으로 둘레 1,193보(步), 첩(堞) 375개, 옹성(甕城) 3곳, 치성(雉城) 6곳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의의

경상좌수영은 조선 전기부터 남해안 방어 체제의 일환으로 설치되어, 특히 일본과 인접한 지역으로서 대일(對日) 관방 체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왜구 방어와 더불어 임진왜란 등 전시(戰時) 상황에서 중요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동래부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상호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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