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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흥

경복흥(慶復興, ?~1380)은 고려 후기 공민왕(恭愍王)부터 우왕(禑王) 시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재상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초명은 경천흥(慶千興)이다. 아버지는 우대언(右代言)을 지낸 경사만(慶斯萬)이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생애

경복흥은 1352년 음서(蔭敍)로 관직에 등용되어 감찰·장령 등을 거쳐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이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지문하정사(知門下政事),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 등을 역임하였다. 1359년 기철(奇轍) 등 부원파(附元派)를 숙청한 공로로 1등공신에 봉해졌다.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공민왕을 호종하여 복주(福州, 현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하였다. 1363년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내세워 침입하자, 경복흥은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서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이를 방어하였고, 이 공으로 좌시중(左侍中)에 올랐다.

1365년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안우경(安遇慶)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흥주(興州, 현 경상북도 영주)로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된 후 소환되어 좌시중에 임명되었고, 정방제조(政房提調)를 겸하며 인사 행정을 담당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후에는 이인임(李仁任)의 주장으로 우왕(禑王)이 즉위하는 과정에 관여하였다. 1377년(우왕 3)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서 개성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하였다.

이후 이인임·지윤(池奫) 등이 권력을 휘두르자 경복흥은 날마다 술을 마시며 정무에 참여하지 않았다. 1380년 이인임과 임견미(林堅味)가 그가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참소하여 청주(淸州)로 귀양 갔으며,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성격 및 평가

경복흥은 권세가 집안 출신이었으나 청렴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후기에는 이인임 일파의 전횡을 제지하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주요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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