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나디 바실레비치 콜빈(러시아어: Геннад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лбин, 1927년 5월 7일 ~ 1998년 1월 15일)은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인이다. 그는 1986년 12월 16일부터 1989년 6월 22일까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냈다.
생애
콜빈은 1927년 소련 스베르들롭스크주 니즈니타길에서 태어났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니즈니타길의 공장에서 모델 디자이너 견습생과 구두장이로 일한 뒤, 1943년 니즈니타길 광산·야금 대학에 입학했다. 1947년부터 1959년까지는 니즈니타길의 공장에서 설계기술자, 기술국장, 부장, 부수석엔지니어 등을 역임했다. 1954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55년 S. M. 키로프 우랄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를 통신 과정으로 졸업하고 이후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정치 경력
콜빈은 1959년 공장 당위원회 서기를 시작으로 지역 당 조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2년 니즈니타길 공산당 레닌 지구위원회 제2서기 겸 제1서기, 1962년부터 1970년까지 니즈니타길 시위원회 제2서기 겸 제1서기를 지냈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공산당 스베르들롭스크 지역위원회 서기장과 제2서기로 재직했으며, 이후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1975년부터 1984년까지 그루지야 SSR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냈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공산당 울리야놉스크 지방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그의 주도로 울리야놉스크에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분교인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센터가 개설되었고, 볼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건설이 결정되었다.
콜빈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최고 소비에트 부대표를 지냈다. 또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재임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체제 아래에서 콜빈은 재임 기간이 길던 디무함마드 쿠나예프를 대신하여 카자흐 SSR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콜빈은 이전에 카자흐 SSR에서 일한 경력이 없었으며, 그의 임명은 카자흐 SSR 공산당 내 부패를 근절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자흐 출신이 아닌 외부 인사였던 콜빈의 임명은 카자흐 지역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취임 직후 알마아타(현 알마티)와 다른 도시들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이는 '젤톡산'(Желтоксан, 카자흐어로 '12월')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수천 명의 시위자가 희생되었고 수백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1989년 6월, 콜빈은 카자흐 출신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로 교체되었고, 모스크바로 전출되었다.
말년
모스크바로 이동한 뒤 콜빈은 1989년부터 1990년까지 당·국가 통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인민대표로 활동했다. 1990년 12월 모든 정치적 직책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1992년부터 1998년까지 OJSC 모스랄방크(Mosuralbank)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다.
1998년 1월 15일, 딸을 방문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을 타던 중 갑자기 몸 상태가 악화되어 쓰러졌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다.
수훈 및 상훈
콜빈은 레닌 훈장(2회), 10월 혁명 훈장, 노동 적기 훈장(2회), 명예 휘장 훈장을 수여받았다.
사적·가족적 측면
콜빈은 소피야 이바노브나 콜비나(1926~1998)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딸 중 하나인 나탈리야(1952~1984)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