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해방(Gay liberation)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서구 세계에서 전개된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들이 급진적 직접행동에 참여하고, 사회적 수치심에 맞서 게이로서의 자긍심(gay pride)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여성주의적 기치 아래, 가장 기본적인 활동 방식은 가족, 친구, 동료에게 커밍아웃하고 공개적인 성소수자로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배경과 기원
게이 해방 운동의 기원은 1969년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서 발생한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s)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경찰의 단속에 항의하여 일어난 이 폭동은 현대 성소수자 권리 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조직화된 운동의 역사는 이보다 앞선다. 19세기 말 서유럽에서는 이미 동성애 해방 운동이 출판물 발행, 사회 단체 결성, 법적 개혁 운동 등으로 전개된 바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는 호모필 운동(homophile movement)으로 통칭된다.
명칭의 의미
'게이 해방(Gay liberation)'이라는 용어는 '여성 해방(women's liberation)'을 반향하여 만들어졌다. 게이 해방 전선(Gay Liberation Front, GLF)은 베트남과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게이 파워(Gay Power)'라는 구호는 흑인 민권 운동에 대응하여 등장한 블랙 파워(Black Power)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운동은 당시 반문화(counterculture), 반인종주의, 반자본주의 경향과도 연결되었다.
주요 전개
1969년 스톤월 항쟁 직후 뉴욕에서 결성된 게이 해방 전선(GLF)은 미국 전역과 해외로 확산되었다. GLF는 기존 사회 제도의 폐지 없이는 완전한 성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혁명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1970년 여름까지 미국 최소 8개 도시에서 스톤월 항쟁 1주년 기념 행진이 조직되었으며, 이는 이후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gay pride parade)로 발전하는 국제적 전통의 시작이 되었다. 1971년에는 스웨덴 외레브로에서 유럽 최초의 게이 파워 행진이 열렸고, 같은 해 프랑스에서는 동성애 혁명 행동 전선(FHAR)이 라디오 방송 중단 시위를 벌이며 프랑스 게이 해방 운동의 공개적 데뷔를 알렸다.
1970년대 블랙 팬서당의 지도자 휴이 뉴턴(Huey P. Newton)은 게이 해방 운동에 대한 공개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하비 밀크(Harvey Milk)가 1977년 공개적인 게이로서는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되는 등 정치적 진출이 이루어졌다.
성격과 영향
게이 해방 운동은 기존의 동화주의적 호모필 운동과 달리 보다 급진적이고 가시적인 행동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의 일부 분파는 젠더와 핵가족 같은 사회의 근본적 제도를 변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의식 고양(consciousness raising)과 직접 행동을 주요 전술로 활용하였다.
1980년대에 HIV/AIDS 위기가 발생하면서 ACT UP과 같은 단체의 활동이 새로운 세대의 성소수자들을 급진화시켰으나,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게이 해방의 급진주의는 민권과 주류 정치를 강조하는 동화주의적 경향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현재 '게이 해방'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LGBTQ+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법적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한 더 넓은 의미의 운동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성소수자 권리 운동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