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로 1세(Gero I, 약 900년 ~ 965년 5월 20일)는 동프랑크 왕국의 작센 공국 출신의 귀족으로, 10세기 중반 오토 1세(재위 936~973년) 치세 동안 엘베강 동쪽의 폴라비아 슬라브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의 독일계 동방 식민 운동(오스트지들룽, Ostsiedlung)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종종 "대공"(라틴어: magnus)이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생애와 배경
게로 1세는 하인리히 1세의 후견인이었던 백작 티트마르(Thietmar)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 따르면, 그는 937년경 자신의 형 지크프리트(Siegfried)를 이어 잘레강 하류의 벤트족 변경지역의 백작 겸 변경백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임명은 오토 1세의 이복 형제인 탕크마르(Thankmar)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탕크마르는 프랑코니아의 에버하르트 및 비히만 등의 귀족과 함께 938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으며, 게로 1세는 자신의 변경백 지위를 유지하였다.
슬라브족 원정
게로 1세는 재임 기간 동안 슬라브족에 대한 일련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다. 939년 오보트리트족의 공격으로 작센군이 패배하고 변경백 지휘관이 사망하자, 게로 1세는 보복으로 슬라브 부족장 30명을 연회에 초청하여 그중 29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스토도라니족이 반기를 들었으나 게로 1세는 이를 진압하였다. 이후 세례를 받은 슬라브 왕자 투구미르(Tugumir)를 매수하여 슬라브계 부족들을 독일의 종주권 아래 복속시켰다.
954년에는 그의 부재 중 우크라니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게로 1세는 귀환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955년에는 오보트리트족, 빌츠족 등 여러 슬라브 부족들이 연합하여 저항하였으나 드로사(Drosa)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게로 1세는 957년, 959년, 960년에도 슬라브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오토 1세가 이탈리아에 체류하던 962~963년에는 폴란드의 미에슈코 1세(메슈코 1세)에게 조공을 강요하고 독일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하였다. 루사티아 지역은 비두킨트(Widukind)의 기록에 따르면 "최하등급의 예속 상태"로 전락하였다고 전해진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 따르면 게로 1세의 영토는 엘베강과 보베르강 너머까지 확장되었으며 네이세강에 이르렀다.
그의 지휘 아래에는 "게로 총독의 휘하에 편성된 군사적 수행원"(milites ad manum Geronis presidis conscripti)이라 불리는 정예 병력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일반 군대(exercitus)와 구분되는 게로 1세의 정예 부대로 간주된다.
가족과 교회와의 관계
게로 1세는 오토 1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오토 1세는 게로 1세의 장남 지크프리트의 대부였으며, 941년 지크프리트에게 슈바벤가우의 영지를 하사하였다. 지크프리트가 사망한 이후인 959년 게로 1세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고, 960년에는 지크프리트의 이름으로 게른로데(Gernrode)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키리아쿠스 교회와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이 교회와 수녀원은 성 키리아쿠스에게 봉헌되었으며, 게로 1세는 사망 시 자신의 막대한 재산 중 상당 부분을 이에 기증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 게로 2세는 이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아내의 이름에 대해서는 기록상 유디트(Judith) 또는 티트스빈트(Thietswind)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사망과 영토 분할
게로 1세는 965년 5월 20일 게른로데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후 넓은 영토는 오토 2세에 의해 여러 변경백국으로 분할되었는데, 여기에는 북부 변경백국(북방 변경), 동부 변경백국(동방 변경), 마이센 변경백국, 메르제부르크 변경백국, 차이츠 변경백국 등이 포함되었다. 이후 북부 변경백국은 다시 란츠베르크, 루사티아,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국으로 세분되었다.
역사적 평가와 비판적 검토
게로 1세의 생애에 대한 주요 1차 사료는 비두킨트 폰 코르바이(Widukind of Corvey)와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Thietmar of Merseburg)의 연대기이다. 그는 일부 기록에서 "동방의 변경백"(Gero Orientalium marchio)으로 언급되며, 전통 역사학에서는 그가 광대한 슬라브 정복 지역의 변경백이었다는 관점, 즉 "게로 변경"(Marca Geronis)이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현대의 학술적 분석에 따르면 그의 변경 관련 일부 문서는 후대의 위조로 판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10세기 중반 변경 지역의 성격과 실제 영향력 범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재검토되거나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는 당대 작센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지 않았다고 전해지나, 이후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변경백 게레"(marcgrâve Gêre)로 묘사되며 문학적으로도 기념되었다. 다만 그가 공식적으로 변경백이라는 칭호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게로 1세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게른로데에 남아 있으며, 약 1350년경 추가된 장식화에는 정복된 벤트족 위에 서 있는 게로 1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