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거창민란(居昌民亂)은 1862년(철종 13) 5월 7일 경상도 거창(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이는 1862년(임술년) 전국적으로 발생한 임술민란(壬戌民亂)의 일부로, 진주민란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
배경
조선 후기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이 심화되면서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거창 지역에서는 부사(府使) 황종석(黃鍾奭)의 탐학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황종석은 이무미(移貿米) 명목으로 받은 돈을 횡령하고, 진상품인 곶감 대신 거둔 가작미(價作米)를 착복하는 등 각종 부정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한 손실을 결가(結價)에 전가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발단 및 경과
진주민란의 영향으로 거창현에서도 삼정의 문란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당시 부사 황종석이 진주민란을 안핵(按覈)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시규(李時奎)·최남기(崔南紀)·이승문(李升文) 등이 주동자가 되어 통문(通文)을 돌려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이무(移貿)·저채(邸債)·환호(還戶) 등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며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과 포교의 집을 포함하여 민가 40호를 부수거나 불태웠다.
결과
부사 황종석은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말미를 얻어 상경(上京)하였다.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이 주동자 이시규·최남기·이승문 등 세 사람을 체포하여 대구감영으로 압송하는 도중, 그들의 족당(族黨)이 이들을 탈취해갔다. 그러나 이후 최남기와 이승문은 다시 체포되어 진주로 보내져 효수(梟首)되었고, 포리(逋吏) 신재문(愼在文)·장복영(章福榮) 등은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부사 황종석은 의금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뒤 곤장 100대를 맞고 상주목(尙州牧)으로 정배(定配)되었다.
의의
거창민란은 1862년 임술민란의 일환으로, 조선 후기 삼정 문란과 지배층의 수탈에 항거한 농민 항쟁의 한 사례이다. 농민들이 구체적인 조세 문제(이무·저채·환호 등)를 지적하며 요구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농민층의 사회의식 성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