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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숙청 사건

갑산파 숙청 사건은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조선로동당 내 정치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갑산파'로 지칭되는 인사들이 대거 축출된 정치적 사건이다. 북한 측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이라고 부른다.

배경

갑산파는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갑산군과 만주 장백현 등지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서 비롯된 세력으로, 1930년대 중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연계하여 '갑산공작위원회' 등의 조직을 결성하였다. 해방 이후 갑산파는 김일성파와 함께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중앙 권력의 핵심 위치를 차지하였다. 1950년대에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이 차례로 숙청되는 과정에서도 갑산파는 존속하며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경과

1960년대 중반, 김일성 개인숭배 강화와 후계 구도 정립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1966년 10월 개최된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조직의 대수술이 단행되면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장·부위원장 직제가 총비서·비서 체제로 개편되는 등 권력구조가 김일성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구조조정에서 소외된 세력의 반발이 표면화되었고, 이는 1967년 5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정점에 달했다. 해당 회의에서 정치위원 겸 조직담당 비서 박금철, 정치위원 겸 대남담당 비서 이효순(리효순), 사상담당 비서 김도만, 국제부장 박용국, 과학교육부장 허석선 등 고위 인사들이 무더기로 비판받고 중앙 권력에서 축출되었다.

북한 당국은 이들이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당간부들에게 퍼뜨렸다거나 '종파주의·가족주의·지방주의'에 빠졌다고 규정하였다.

원인 분석

학계에서는 갑산파 숙청의 근본 원인에 대해 여러 해석이 제시된다. 대표적인 견해로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상하던 김영주와 김정일에 대한 갑산파의 반발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1960년대 중반 북한의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의 리베르만 개혁 방식을 부분적으로 시도한 점이 '수정주의'라는 명분으로 비판되어 숙청의 정략적 근거로 활용되었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결과와 영향

이 사건 이후 북한에서는 모든 권력이 김일성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권위가 절대화되는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지도체계'가 확립되었다. 또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전통'이 강조되며 개인숭배 구조가 정착되었다. 갑산파 숙청 과정을 계기로 김정일이 정치적으로 부상하여 이후 후계자로 자리 잡은 것으로 분석된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갑산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숙청된 인물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부른다.

명칭에 관한 참고 사항

'갑산파'는 북한 당국이 정식으로 사용한 명칭이 아니라, 이들 인사들이 숙청된 이후 북한 당국의 부정적 인식과 함께 학계 및 대외적으로 통용되던 비공식적 명칭이다. 갑산파라는 명칭은 이들이 활동하던 함경북도 갑산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들이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1967년까지 일관된 하나의 파벌로서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북한의 갑산파 숙청과 '혁명전통'의 굴절』, 역사비평 제139호 (2022)
  • 『1960년대 중반 북한 경제위기 양상과 혁명전통의 유일성 확립』, 현대정치연구 제11권 1호 (2018)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NK리포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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