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문제는 한국(조선, 대한제국)과 중국(청나라) 사이에 발생했던 영토 분쟁이자, 이에 수반된 복합적인 역사적 쟁점을 의미한다. 두만강 북쪽에 위치한 간도(間島)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1712년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지강(東爲土門之江)' 문구 해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1909년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일단락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이 협약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현재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는 사안이다.
1. 명칭 및 지리 '간도(間島)'는 '사이 섬'이라는 의미로, 크게 협의의 간도와 광의의 간도로 나눌 수 있다.
- 협의의 간도: 두만강 북쪽 지류인 석을수(石乙水)와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土門江, 현재의 해란강 또는 가야하) 사이의 지역을 일컫는다.
- 광의의 간도: 압록강 동쪽과 두만강 북쪽, 그리고 송화강 남쪽 유역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의미하며, 길림성 일대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현재는 대부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吉林省)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일부에 해당한다.
2. 역사적 배경 및 전개
-
백두산정계비 건립 (1712년): 청나라와 조선은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 새겨져 있었다. 즉, 서쪽 국경은 압록강, 동쪽 국경은 토문강이라는 뜻이다.
-
'토문강' 해석의 문제: 여기서 '토문강'이 어느 강을 의미하는지가 핵심 쟁점이 되었다.
- 조선의 입장: '토문(土門)'을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土門江)으로 보아,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 청나라의 입장: '토문(土門)'이 두만강(圖們江)의 이칭이거나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지류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며 간도 지역이 청나라 영토라고 주장했다.
-
조선인의 이주와 영유권 분쟁 심화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인들이 기근 등을 피해 간도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여 개간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조선과 청은 각기 관리를 파견하여 영토권을 주장하며 충돌이 잦아졌다.
-
대한제국의 간도 이주민 보호 및 관할 노력 (20세기 초): 대한제국은 간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명확히 하고 이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3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고, 1904년에는 간도관리사 파견을 공식화하며 간도 지역에 대한 행정권 확보를 시도했다. 간도 한인들을 보호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다.
-
간도협약 (1909년): 러일 전쟁 승리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은 만주 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얻기 위해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으로 일본은 간도 지역이 청나라 영토임을 인정하는 대가로, 남만주 철도 안봉선(안동-봉천)의 철도 부설권 등 만주에서의 이권을 확보했다.
3. 쟁점 및 의의
- 협약의 불법성: 한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강탈한 상태(을사늑약, 한일신협약 등)에서 체결된 간도협약은 원천 무효이며, 대한제국의 동의 없이 타국의 영토를 처분한 것이므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 역사적 근거: 간도 지역에 대한 조선의 역사적 기록,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 해석,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의 실효적 지배 노력 등을 근거로 간도가 한국의 고유 영토였음을 주장한다.
- 중국의 입장: 청나라는 간도 지역이 역사적으로 '봉금지대(封禁地帶)'로 비어있던 곳이며,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이미 최종적으로 해결된 문제라고 주장한다. 또한,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간도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의 영토 주권 회복이라는 민족적 염원과 직결되는 문제이면서도, 국제 외교 관계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있다. 현재 해당 지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