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가흥 (서량)

가흥(嘉興)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에 존재했던 서량(西凉)의 제2대 군주 이흠(李歆)이 사용한 연호(年號)이다. 서량의 초대 군주 이고(李暠)의 건초(建初) 연호를 이어받아, 417년 2월부터 420년 7월까지 약 3년 6개월 동안 사용되었다.

이흠은 417년 아버지 이고가 병으로 사망한 뒤 즉위하면서 연호를 가흥으로 개원(改元)하였다. 그러나 이흠은 신하에게 냉혹하게 대하고 간언을 무시하는 등 통치에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420년 7월, 그는 북량(北凉)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으나 회성(懷城) 부근에서 북량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고,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서량은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이흠의 동생 이순(李順)이 돈황으로 도망쳐 서량을 일시적으로 부활시켰으나, 421년 저거몽손이 돈황을 점령하면서 서량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가흥 연호가 사용된 시기의 연대 대조를 보면, 원년은 417년(육십간지 정사·丁巳)이며, 418년 무오(戊午), 419년 기미(己未), 420년 경신(庚申)까지 총 4년에 걸쳐 사용되었다. 같은 시기에 동진(東晉)에서는 의희(義熙)와 원희(元熙), 후진(後秦)에서는 영화(永和), 서진(西秦)에서는 영강(永康)과 건홍(建弘), 북량에서는 현시(玄始), 하(夏)에서는 봉상(鳳翔)·창무(昌武)·진흥(眞興), 북연(北燕)에서는 태평(太平), 북위(北魏)에서는 태상(泰常) 등의 연호가 각각 사용되고 있었다.

가흥 이전에 사용된 서량의 연호는 건초(建初)였으며, 가흥 이후의 다음 연호는 이순이 사용한 영건(永建)이다. 이흠에게는 시호와 묘호가 주어지지 않았고 후주(後主)로 불렸다. 한편 '가흥'이라는 한자 표기는 중국 남방의 지명 및 명승지로도 널리 알려진 '가흥(嘉興, 현재의 저장성 자싱)'과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나, 본 항목에서 다루는 것은 서량 이흠의 연호로, 실제 역사 기록에 근거한 명확한 사료가 존재하는 개념이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