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노 도요토시(賀陽豊年, かや の とよとし)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일본 귀족·문인·한학자이다. 성(姓)은 아소미(朝臣)이며, 관위는 종4위하(從四位下)·하리마노 가미(播磨守), 증정4위하(贈正四位下)이다.
출신
가야씨(賀陽氏)는 기비씨(吉備氏)의 후예로, 가미쓰미치씨(上道氏)와 같은 계통의 씨족이다. 빗추국(備中國) 가야노 고오리(賀陽郡, 현재의 오카야마현)를 본거지로 한 호족으로, 가야노 고오리노 쓰가사(賀陽郡司)와 기비쓰 신사(吉備津神社)의 신관을 세습한 집안이다.
생애
751년(덴표쇼호 3년)에 태어났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정통하여 대책(對策)에 갑제(甲第)로 급제하였다.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石上宅嗣)가 세운 운테이(芸亭)에서 배우며 수년간 많은 서책을 널리 연구하였다. 그의 문재(文才)는 석 도유(釋道融)나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도 미치지 못한다고 칭송되었다.
문장박사(文章博士)를 거쳐 797년(엔랴쿠 16년) 동궁학사(東宮學士)가 되어 황태자 아테 친왕(安殿親王, 훗날의 헤이제이 천황)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헤이제이 천황 즉위 후 중용되어 종4위하·식부대보(式部大輔)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구스코(藤原藥子)가 권세를 휘두르며 우수한 인물들이 배척당하는 상황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810년(다이도 5년) 구스코의 변(藥子の變) 이후 식부대보에서 물러났으나, 곧 사가 천황(嵯峨天皇)의 요청으로 하리마노 가미(播磨守)에 임명되었다. 813년(고닌 4년) 병으로 사임한 후 우지(宇治)의 별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815년(고닌 6년) 6월 27일, 65세로 사망하였다. 임종 무렵, 우지의 노인으로부터 닌토쿠 천황(仁德天皇)과 그 동생 우지노와키 이라쓰코(菟道稚郎子)가 서로 황위를 양보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좌대신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에게 청해 닌토쿠 천황의 "지하지신(地下之臣, 저승의 신하)"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사가 천황은 그의 죽음에 정4위하를 추증하고 닌토쿠 천황릉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였다.
문학
일본 최초의 칙찬 한시집인 《능운집(凌雲集)》(814년 편찬)의 편찬에 오노노 미네모리(小野岑守), 스가와라노 기요토모(菅原清公)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능운집》에 수록된 그의 한시는 13수로, 사가 천황(22수) 다음으로 많으며 오노노 미네모리와 동수이다. 또한 《경국집(經國集)》에도 5수가 수록되어 있다.
무덤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전(傳) 가야노 도요토시 묘(傳賀陽豊年墓)는 우지노와키 이라쓰코의 무덤(宇治墓)의 배총(陪冢)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물
그는 신념이 굳고 신의를 지켰으며, 아는 사람 외에는 교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것을 싫어하여, 친구 오노노 나가미(小野永見)를 방문했을 때 "백안 대 삼공(白眼對三公, 흰 눈으로 대신을 대한다)"이라는 한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가 타고난 덕(天爵)은 넘치나 벼슬(人爵)은 부족했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