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봉의 역사는 아프리카 중서부, 적도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가봉 공화국의 과거와 현재를 다루는 역사적 서술이다. 가봉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며, 토착 수렵채집 사회, 반투족의 이주, 유럽과의 접촉 및 대서양 무역, 프랑스 식민 통치, 독립 이후의 정치적 변천을 주요 축으로 구성된다.
선사 시대 및 고대
현재의 가봉 지역에 최초로 거주한 것은 피그미(Pygmy) 계열의 열대우림 수렵채집민으로, 그 존재는 약 기원전 4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후기 플라이스토세부터 신석기 시대까지 해안가와 오고우에(Ogooué) 강 유역을 따라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약 기원전 400~300년경에는 반투어를 사용하는 농경 및 철기 제작 공동체가 오고우에 중류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지역 전역으로 정착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리브르빌 근교의 오웬도(Owendo)에서 발굴되었으며, 석기, 토기, 조개껍질, 화덕 등이 약 5,040년 전(기원전 3,000년경)의 것으로 연대 측정되었다.
식민지 이전 시대
유럽인과의 접촉 이전 가봉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여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14세기부터 반투계 이주민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였고, 팡(Fang) 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 사회가 형성되었다. 해안 지역에서는 미예네(Myene)어를 사용하는 음퐁웨(Mpongwe), 오룬구(Orungu), 은코미(Nkomi) 등의 정치체가 발달하여 강줄기와 유럽 선박을 연결하는 중개 무역을 수행했다.
1472년,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이 지역에 최초로 도착했다. 국명 "가봉(Gabon)"은 포르투갈어 "gabão"(소매와 후드가 달린 망토)에서 유래하였으며, 코모(Komo) 강 하구의 모양을 닮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포르투갈인들은 상투메, 프린시페, 비오코 섬에 정착했으며, 해안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무역을 진행했다.
16세기부터 유럽 노예 무역상들이 유입되면서 이 지역은 대서양 노예 무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가봉 해안의 노예 수출 규모는 남쪽의 주요 거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으며, 1788년 기준으로 "가봉과 케이프 로페즈" 지역에서 연간 약 500명이 거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 무역 외에도 상아, 구리, 소금, 라피아 직물 등이 주요 교역 품목이었다. 남부 해안 일대는 로앙고 왕국(Kingdom of Loango)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프랑스 식민 통치 시대
1838년과 1841년, 프랑스는 가봉 해안 지역의 추장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해안 지역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1842년에는 미국 뉴잉글랜드 출신의 선교사들이 코모 강 하구에 선교단을 설립했다. 1849년, 프랑스 당국은 불법 노예선을 나포하여 선상의 포로들을 풀어주었고, 이들은 선교장 근처에 정착촌을 세웠는데 이것이 수도 리브르빌(Libreville, 프랑스어로 "자유 도시")의 기원이 되었다.
1862년부터 1887년 사이 프랑스 탐험가들이 가봉 내륙의 밀림 지역을 탐험했다. 가장 유명한 탐험가인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Pierre Savorgnan de Brazza)는 콩고 강의 원류를 찾기 위해 가봉인 운반자와 안내자를 이용했다. 프랑스는 1885년 가봉을 점령했으나 본격적인 통치는 1903년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 가봉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French Equatorial Africa)의 4개 영토 중 하나가 되었다. 1922년경 가봉 최초의 정당인 청년 가봉(Jeunesse Gabonais)이 창당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가봉은 잠시 자유 프랑스(Free French) 세력과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세력 간의 충돌이 발생한 지역이기도 했다.
독립과 초기 정치 발전
1960년 7월 15일, 프랑스는 가봉의 완전한 독립에 합의하였고, 1960년 8월 17일 가봉은 독립국이 되었다. 독립 당시에는 레옹 음바(Léon M'Ba)가 이끄는 가봉 민주 연합(BDG)과 장힐리어 오바메(Jean-Hilaire Aubame)가 이끄는 가봉 민주 사회 연합(UDSG)이라는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존재했다. 초대 의회 선거에서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으나, 두 당 지도자는 단일 후보 명단에 합의하여 1961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음바가 대통령, 오바메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1963년 단일 정당 체제가 붕괴되었고, 1964년 2월 18일 가봉 군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음바 대통령을 축출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다음 날 개입하여 음바 정부를 복원시켰다. 1967년 3월, 레옹 음바와 오마르 봉고(Omar Bongo, 당시 알베르 봉고)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말 음바가 사망하면서 오마르 봉고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오마르 봉고 체제
1968년 3월, 오마르 봉고는 BDG를 해산하고 가봉 민주당(PDG)을 창당하여 가봉을 일당제 국가로 선언했다. 봉고는 1973년 2월 대통령으로 정식 선출되었고, 1975년 4월 부통령직이 폐지되고 총리직이 신설되었다. 이후 1979년 12월과 1986년 11월에 각각 재선되었다.
경제적 불만과 정치적 자유화 요구는 1990년 초 학생과 노동자들의 폭력 시위와 파업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봉고는 정치 개혁을 약속했고, 1990년 3월~4월 국가 정치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상원 설립, 예산 절차 지방분권, 집회 및 언론의 자유, 출국 비자 요구 철폐 등의 개혁을 승인했다. 1991년 3월 새 헌법이 시행되었고, 1990년 9월~10월에는 30년 만의 복수정당 총선거에서 PDG가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후에도 봉고는 1993년, 1998년,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선거 과정에 대한 야당의 부정 제기와 시민 소요가 발생했으나, 봉고는 2009년 6월 8일 스페인 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알리 봉고 온딤바 시대와 최근 동향
오마르 봉고 사후, 그의 아들 알리 봉고 온딤바(Ali Bongo Ondimba)가 2009년 8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16년 8월 재선에 성공했으나, 선거 과정에서의 부정 행위, 체포, 인권 침해, 선거 후 폭력 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18년 10월, 알리 봉고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공개되지 않은 질병으로 입원하였고, 이후 라바트로 이송되어 회복하였다. 2019년 1월 7일에는 군부의 불완전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진압되었다. 2022년 6월, 가봉은 영연방(Commonwealth)에 55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2023년 쿠데타와 이후
2023년 8월, 대통령 선거에서 알리 봉고가 3선에 성공했다는 발표 직후, 군 장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고 선언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봉고 가문의 55년 장기 집권이 종식되었다. 군부는 브리스 올리기 응게마(Brice Oligui Nguema) 장군을 과도기 지도자로 지명했고, 2023년 9월 4일 그는 과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25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브리스 올리기 응게마가 90% 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가봉의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