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가례

가례(家禮)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로, 한자 표기와 맥락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의미는 남송(南宋)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저술한 예서(禮書) 『가례(家禮)』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왕실 의례 체계에서 쓰인 오례(五禮) 가운데 하나인 가례(嘉禮)를 가리키기도 한다.

첫째, 『가례(家禮)』는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시행할 관혼상제(冠婚喪祭), 즉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의 절차를 규정한 예서이다. 주희는 부친상(1143년)과 모친상(1169년)을 치르면서 관련 예법 자료를 수집·정리하였고, 이후 관례와 혼례의 내용을 추가하여 『가례』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책은 초고 상태에서 분실되었다가 주희 사후에 세상에 다시 나타나, 친작(親作)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주희의 저술로 간주된다. 『가례』는 『주자가례(朱子家禮)』 또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라고도 불린다. 본문은 통례(通禮) 43조목, 관례 30조목, 혼례 38조목, 상례 221조목, 제례 72조목으로 구성되며, 각 조목 아래에 본주와 부주가 수록되어 있고 책머리에는 「가례도(家禮圖)」가 실려 있다.

『가례』의 중국 내 간행은 1211년과 12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후 주희의 제자 양복(楊復)이 『가례부주(家禮附註)』를 편찬하였고, 주복(周復)이 이를 재편집하여 1245년에 간행한 것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송각본(宋刻本)이다. 명대(明代)에는 관련 주석을 집성한 『가례』가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되어 널리 유통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본격적인 보급은 조선 시대에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 태종 3년(1403)에 『주자성서(朱子成書)』본 『가례』가 수입되었고, 이후 『성리대전』에 수록된 『가례』가 여러 차례 수입·간행되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에서 『가례』는 다섯 차례에 걸쳐 간행된 것으로 확인되며, 기존 4권 체제를 7권으로 확대 편성한 판본(1658년) 이후 조선에서 간행된 모든 『가례』는 7권 체제를 유지하였다. 『가례』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예를 시행하는 기준이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예학(禮學) 연구가 폭넓게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가례』 연구는 초기의 해석 단계에서 출발하여 미비점을 보완하고 조선 사회의 현실에 맞게 정립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둘째, 가례(嘉禮)는 중국과 조선의 국가 의례에서 쓰인 용어로, 길례(吉禮)·가례·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로 구분되는 오례 가운데 하나이다. 백성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경사스러운 의례를 뜻하며, 협의로는 왕실 가족의 혼례를 가리킨다. 조선에서는 왕비·왕세자·왕세자빈의 책봉, 왕세자와 왕세손의 관례, 국왕과 왕세자의 혼례 등이 가례에 포함되었고, 혼례 시에는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고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가 작성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왕실 가례의 본 의식은 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책비(冊妃) 혹은 책빈(冊嬪)·친영(親迎)·동뢰(同牢)의 육례(六禮)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가례’라는 용어는 한자 표기에 따라 『가례(家禮)』라는 예서와 가례(嘉禮)라는 국가 의례 용어로 구분되며, 어느 쪽을 지칭하는지는 문맥과 사용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두 용어 모두 한국의 역사와 유교 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개념으로, 공신력 있는 백과사전과 학술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개념이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