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척화비(加德島 斥和碑)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에 있는 조선 후기의 척화비이다.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고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고취하기 위해 전국 주요 지점에 세운 비석을 말하며, 가덕도 척화비는 이러한 전국적 척화비 건립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개요 및 지정 현황
이 비는 1871년(고종 8)에 건립되었으며, 1993년 2월 1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일대이며, 관련 자료에 따라 표기상 차이가 있어 성북동 344번지 또는 56-1번지 등으로 확인된다. 비는 화강석 재질로, 높이 약 150㎝, 너비 약 45㎝, 두께 약 16㎝의 규모로 알려져 있다.
비문 내용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움(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는 1866년 병인년에 제작을 시작하여 1871년 신미년에 세워졌다는 뜻으로, 병인양요 이후 척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설립 배경
이 비는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외정책 변화와 관련이 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국내적으로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통상 개방 압력에 맞서 점차 쇄국 정책으로 기울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쇄국 정책이 더욱 굳어졌고, 그 의지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전국의 주요 통로와 지점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가덕도 척화비는 수군 함정의 군항지였고 가덕 청사가 있던 성북동 선창마을 일대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동 및 보존 경위
이 비는 원래 가덕 포구(성북동 선창마을) 부근에 있던 것으로, 한때 천가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학생들의 역사 교육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1991년 12월 강서구청이 이를 선창마을회관 앞에 복원하였으며, 자료에 따라서는 1995년 또는 1996년 천가초등학교 교정으로 이전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소재지에 대한 서술은 사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관내에서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적 의의
가덕도 척화비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쇄국 정책과 대외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금석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대부분의 척화비가 철거된 상황에서 남아 있는 희소한 사례로, 조선 후기 대외 관계사와 지역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