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정(賈居貞, 1218년~1280년)은 중국 원나라 초기의 관료이다. 자(字)는 중명(仲明), 호(號)는 녹천(鹿泉)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하북성 진정부(真定府) 획록현(獲鹿縣), 즉 오늘날의 허베이성 스자좡시 루취안구 일대 출신이다.
생애 개요
가거정은 성인이 된 직후부터 몽골 제국의 행대종사(行臺從事)로 재직하며 청렴한 행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뇌물로 황금 50냥을 받기를 거절했던 일화가 알려져 있으며, 이를 전해들은 태종 오고타이가 그를 칭찬하며 100냥을 하사했다고 한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개평성(開平城)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1260년(중통 원년)에는 중서좌우사낭중(中書左右司郞中)을 지냈고, 쿠빌라이가 북쪽으로 원정할 때 수행하면서 《자치통감》을 강론하였다. 이후 중서성 참의, 중서랑중 등을 거쳐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었으며, 승상 사천택(史天澤)과 함께 국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1273년에는 양양로총관(襄陽路總管)에 임명되었다. 1274년 남송 정벌 당시 바얀(伯顔)이 이끄는 대군에 합류하여 악주(鄂州) 수비를 맡았으며, 이곳에서 곡식을 풀어 유민을 구제하고, 송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지역의 상인들에게 통행증을 발급하여 돌려보내는 등 통치술에 능한 행정가의 면모를 보였다.
1276년 남송이 사실상 멸망한 뒤에도 각지에서 이어진 저항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관여하였으며, 1277년 호북선위사(湖北宣慰使)를 지냈다. 몽골 장수들의 횡포를 억제하여 백성들이 학궁(學宮)에 그의 상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에는 강서행성참지정사(江西行省参知政事)로 임명되었으며, 반란 진압 과정에서 연루 의심 명단을 소각하는 등 선처를 보이기도 하였다.
1280년, 원나라가 재차 일본 원정을 준비하면서 강남 일대에 전선 건조를 추진하자, 백성들의 고통이 반란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쿠빌라이에게 일본 침공 중지를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조정으로 향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63세였다. 사후 충보의공신(忠輔義功臣), 은청영록대부(銀青榮祿大夫),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에 추증되고 정국공(定國公)에 추봉되었다.
다른 용례 및 맥락에 대하여
'가거정'이라는 표기는 위에서 살펴본 원나라 역사 인물의 이름(賈居貞) 외에, 한국에서는 가거도(可居島)에 위치한 정자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으나, 이에 대한 공신력 있는 문헌이나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개인 명칭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온라인에서 일부 확인되나, 이 역시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명칭일 뿐 보편적으로 알려진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가장 명확하게 기록으로 확인되는 의미는 원나라 초기의 관료였던 가거정(賈居貞)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인명이다. 해당 인물에 관한 상세 기록은 《원사(元史)》 열전 제153권에 수록되어 있다.